우화, 풍자, 유추, 이야기 등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은 암덩어리와 같이 도처에 잠입한 인과론적 사유에 의해 유감스럽게도 추방된 설명원리들입니다. 예수도 자신의 말에 강조와 권위를 부여함에 있어서 인과성에 대해서 말한 적 없습니다. 그는 시각적인 표현들로 말했고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는 낙타와 부자들 간의 어떤 인과적 관계도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추와 우화 그리고 이야기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이해했습니다. 문제는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형식과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인과론적 사유의 사회적 주입력 및 권력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원인과 결과의 결합을 무조건적으로 믿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들에 대한 끔찍하게도 단순한 표상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
마주보는 두 개의 거울 사이에 있는 사물은 하나의 거울에 비친 사물의 상과 달리, 그 상이 거울 속의 거울에 무한히 연쇄된다. 그 상의 연쇄는 그 상 그대로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거울에 비춰지고 있는모습까지 비추어진 상들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마주보는 두 개의 거울은 그 상을 이중으로 투영하는 것인데, 거울은 그 상을 투영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상이 투영되고 있는 거울 전체를 투영한다. 베케트 극미학의 요체는 그러한 마주보는 거울의 이중성과 거울 유희 - 거울이 거울을 되비치는 유희 -의 원리를 담지하는데 있다. (거울, 마주보는 거울 p1, 동국대 영문학 석사논문 1999)
0. 그것을 위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따로 할 일은 없다. 그냥 생활하면서 마음가는 대로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다 무슨 마음이 생기겠지 궁금해하며 무심히 기다린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게 전부다. 기다리는 조바심에 어떻게 해볼까 이것저것 시도도 해 보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누군가는 신이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신의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이 문제가 '알 수 없는 일', '모름', '무지'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 말하면, '모른다'고,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때 신의 사람들에게 당신은 믿음과 앎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해줄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그들도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신의 ..
나는 김혜자가 좋다. 나에게 그녀는 늙어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설명할 수 없는 매혹에 끌린다.] 맑고 선하고 지혜롭고 무엇보다 사랑스럽다. 고마운 마음에, 나도 닮고 싶은 마음에, 내 마음을 흔드는 그녀의 얘기를 잘 기억하기 위해, 여기 적어놓는다. 1. "나는 상 타나는 데 나가서 앉아있는 걸 참 싫어해요. 어떻게 생각하면 참 이기적이고 그런데, 배우는 연기, 너무너무 열심히 해서 좋은 드라마 하면 되지 상타는 데 까지 나가서 앉아있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안나갈라고 맨날 그랬는데 좌우지간 나갔어요." 2. 아프리카 같은 데로 봉사 가면 위험하지 않아요? 남편은 고생보다 위험하니까, 전쟁이 막 끝난 곳도 있고 그러니까 걱정스럽게 쳐다보죠. 걱정스럽게 쳐다보는데. 저는, "있잖아, 현식아빠, 사람..
김혜자 수상소감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시간은요, 정말 덧없이 확 가버려요. 어머나, 하고 놀라면 까무룩 한세월이야. 안타까운건 그걸 나이 들어야 알죠. 똑똑하고 예민한 청년들은 젊어서 그걸 알아요. 일찍 철들더군요. 그런데 또 당장 반짝이는 성취만 아름다운건 아니에요. 오로라는 우주의 에러인데 아름답잖아요. 에러도 빛이 날 수 있어요. 하지만 늙어서까지 에러는 곤란해요. 다시 살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 눈앞에 주어진 시간을 잘 붙들어요. 살아보니 시간만큼 공편한게 없어요. [내게는 '시간'이란 무엇입니까?하고 시작하는 이 수상소감이, 셰익스피어의 어느 명대사 같다. 눈부시다.] 눈이부시게 마지막화 김혜자 명대사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
1.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만 하고 싶을 뿐이다. 부과적인 나머지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2. 포크너 작가의 의무는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해 낸 후에 남아 있는 의무는 그 어떤 방법이든 마음대로 처리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글을 쓰는 데 너무 바빠서 대중들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나에겐 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궁금해 할 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내 작품 또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 작품에 대해서는 내 자신의 기준만 충족시키면 됩니다. 즉 내 작품을 읽으면서 이나 구약 성경을 읽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지 시험해 봅니다. 이 두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
1. 선생님이 일관성을 지키고자 한다면,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생님의 생각에 동의하라고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배와 조작을 용인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어떻게 사람들을 확신시키죠? 나는 결코 누구도 확신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 생각들을 접하고는 골치 아파 합니다.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나는 결코 그들의 견해들을 교정해서 내 자신의 생각을 그들에게 강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사람들은 지난 20여년 동안 내가 출간한 것들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것들이 그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가 쓴 것을 단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강의를 들으러 오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나의 성찰들을 따르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