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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떠한 체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것의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외부의 영향력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110)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어떤 분자체계에 충격을 가하는 외적 작용체가 일정한 효과들을 유발하지만 그것들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충격도 단지 어떤 구조적인 동학을 유발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결과들을 체계 자체의 구조에 의해 특정지어지고 결정됩니다.(112)
<있음에서 함으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나의 신체이다. 화가 난 나의 신체는 외부작용체를 원인으로, 예컨데 타인의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화가 난 것이 아니다. 타인은 유발할 수 있을 뿐이다. 비유하자면 부탁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신체는 그 부탁에 반응하거나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 이때 반응은 나의 신체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신체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모른다. 우리의 신체는 끊임없이 변하는데 그 변화는 원인의 결과이며, 우리의 신체는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를 통해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 원인들의 질서를 모른다는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원인들의 연결들을 이해하지만 정확히 어떤 질서(속도와 위치의 관계들)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일어난 화는 지금 나의 신체의 상태를(원인들의 연결과 질서를) 드러내주는 것이다. 타인으로 유발된 화는 나의 신체의 상태를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그런데 타인이 나를 화나게 하였다고, 즉 이를 원인으로 삼을 때, 즉 결과를 원인으로 알 때 원인과 결과가 뒤집힌 전도몽상의 현상이 일어난다(이 전도몽상으로부터 괴로움의 윤회시스템이 돌기 시작한다). 같은 말을 듣고도 화를 내는 사람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지은 업식이 달라 또는 지은 인연이 달라 그렇다할 수 있다. 따라서 업이 짓는 것이지 외부작용체가 짓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이렇게 나의 업식을 드러내주는 정보다. 이 정보를 정보로 받아들이지 않고 행위에 대한 원인으로 삼으면 과보를 받는데, 왜냐하면 행위는 주어진 상황을 근거로 그에 맞는 적합한 행위를 해야하는데 감정에 매여 행동을 하게되면 이를 벗어나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는 반드시 우리에게 해롭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슬픔의 감정들이(예컨데 증오) 악인 이유는 우리에게 우리 신체를 해롭게 할 뿐 아니라 괴로움의 윤회바퀴에 삶을 희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란 나의 업식이 지어내는 감정이란 정보를 원인으로 삼지않고 정보를 정보로 받아들이면서 불교적으로 말하면 알아차리고, 내려놓아 감정에 얽매여 행동하지 않고 시공과 인과에 맞쳐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중도라고 하며 이때 행동은 겉으로 보기엔 감정에 매여 행동하는 사람이나 감정을 참는 사람처럼, 감정에 따르는 것으로 또는 감정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행동하는 자유인의 행동이다.
감정에 상관없이 시공과 인과에 따라 행동하려면 시공과 인과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삶이 뒷바침되야한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지혜로워진다는 말과 동일하다.
요컨대 화는 왜 나는가? 라는 질문(자기나름의 화두를 통해)에 해답을 찾고, 이로서 자기분야에서 지혜를 쌓으면 그것이 참지식이자 자유로운 삶의 비결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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