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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제어하고 억제함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감정에 종속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운명의 지배 아래에 있으며,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종종 강제될 정도로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4부 서론>
우리는 왜 감정에 예속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감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정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감정은 어디서 생기는가?
한 신발을 보고 예쁘다는 좋은 감정이 들었다. 우리는 '저 신발은 예쁘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신발의 예쁨이 신발에 있음을 당연시하는 관행을 가지고 있다. 저 신발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따라서 저 신발은 독립적인 존재로서 예쁜 신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체험이 너무도 분명하니 틀림없는 사실로 확정해버린다.
그러나 신발의 예쁨은 신발에 있지 않다. 신발은 신발일 뿐이다. 내가 신발을 예쁘게 보는 것이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다시 돌아가 좋은 감정을 예쁜 신발이 주는 것으로 인식하면 감정의 원인이 '따로 독립되어 있는' 예쁜 신발에 있다. 감정을 일으키는 요인을 독립되어 있는 외부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감정에 예속된다. 요인이 밖에 있으므로 나는 여기서 무능력하다. 독립된 대상으로부터 객관적인 좋은 감정이 주어져야 비로서 내가 그 감정을 얻을 수 있으니 감정에 예속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감정은 신발과 동일시되고 신발을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알고 있다.
신발에 집착해 보았자 헛 일이다. 여실히 보면 예쁜 신발은 내가 신발을 예쁘게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불교 용어를 빌리자면 형성된 업식에 의해), 저 신발을 예쁘게 본다. 저 신발은 원인이 아니다. 저 신발은 나의 감정을 유발할 뿐 감정을 결정하지 못한다. 예쁘다는 대상에 예쁘다가 없다. 만일 저 신발이 예쁘다는 게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사실이라면 모든 사람이 예쁘다고 받아드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일상에서 쉽게 경험한다.
무지를 바로 알면, 감정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감정이 밖이 아닌 내 안에서 결정되는 것임을 알면 나는 감정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나는 내 안에서 결정되는 감정을 알아차린다. [알아차림을 통해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감정을 따를지 따르지 않을지 감정의 주인으로서, 인연을 따라 행한다. 인연을 따라 선택한다. 무지를 바로 알면,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앎, 이 앎의 앎이 우리를 감정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삶을 살게 한다. 앎이 곧 삶이다.
스피노자는 지적한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운명의 지배 아래에 있으며,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종종 강제될 정도로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너무도 당연하게 관습처럼 받아들여 한번도 무지를 마주한 바가 없기 때문이지 않나.
모든 고귀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깨닫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