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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은 내가 지은 인연의 총체의 드러남이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신체 변용의 관념의 포괄적인 개념이다. 나의 신체는 끊임없이 변이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분리되지 않는] 연결되어 연동하는 나의 신체는 무상한 흐름이다. 이 흐름에 대한 관념이 마음으로 산출된다.
먼저 감정에 관해서. 스피노자는 우리 신체 변용이 작은 완전성에서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를 기쁨이라고 포착한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신체 변용의 관념이 기쁨[이와 반대는 슬픔]이라는 마음 상태로 산출된다. 이때 이 기쁨의 감정은 허망한 것, 허망한 분별이 아니다. 요즘 말로 리얼이다.
그런데 이 감정에 사로잡힐 때. 이 감정은, 즉 신체 변용의 관념의 마음 상태는 무상한 흐름이다. 붙잡을 수가 없다. 흐르는 물을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붙잡을 수 없는데, 바로 이 점에 무지하다보니 붙잡으려 한다. 집착한다. 불가능한 일을 붙잡고 있으니 부작용이 생긴다. 괴로움이 생긴다. [괴로움의 원인은 욕망이 아니다, 무지다]. 붙잡을 수 없는 감정을 붙잡으려하는 분별, 이 집착, 이 생각이 바로 허망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본다.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본다는 것 역시 우리 신체 변용의 관념인 마음 상태의 표상이다. 사물은 우리가 보는 것이다. 정말로 사물이 저기 있음을 알기 위에선, 사물이 저기 있다고 이미 전제하지 않는다면 저기 있음을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우리가 보는 것은 독립되어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신체 변용의 관념인 마음 상태를 보는 것이다. 흔들리는 건 깃발이 아니라 마음이다. 흔들리는 깃발을 보고 흔들리는 깃발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재표상이 바로 허상이다. 문제는 따로 독립되어 있다고 확실히 전제할 때, 주체와 대상이 나뉘고 나를 세움으로서 나의 것이 생기고 나와 나의 것을 동일시하여 나의 것에 집착하고, 집착은 소외를 만들고 소외는 타자를 부정하고, 옳고 그름을 내세워 타자 부정을 정당화시키고, 전쟁도 불사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 악순환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잘못 알고 있는' 무지에서 일어난다. 독립되어 존재한다는 상이 바로 허상이다. 허망한 분별이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가 보는 것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체험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본다. 너무도 당연하다. 너무나 당연해서 깨닫기가 어렵다. 때문에 <금강경>은 그 해법으로 '상을 보면서 상 아닌 것을 본다'고 제시하고 또 실재표상을 "환상처럼, 꿈처럼 보라'고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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