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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는 재능 있는 사람들의 오류는 뇌를 이해하기 위한 더 나은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된 것은 뇌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뇌에 대한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뇌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원래 우리는 뇌를 파악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설명하고 스스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론의 구조는 스스로를 기술해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상징화시켜서 말하자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인 우로보로스와 같습니다. 여기서도 순환성이라는 현상이 다시 등장합니다. 사실 저는 유럽의 학문전통을 익힌 채 미국에 도착해서 초기 사이버네틱스학자들과 공동작업을 할 때 순환성이라는 개념 틀이 인식이론적 관점에서도 근본적이고 매우 광범위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려 했습니다.

광범위한 결과들이란 어떤 것들입니까?

우선, 사람들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을 대하는 완전히 다른 태도입니다. 우리는 관찰하는 사람과 관찰의 대상과 객체를 묶어주는 순환고리에 빠져들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뇌를 설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설명을 행할 때 사용하게 되는 자신의 뇌도 설명해야 하는 겁니다.

갑자기 사이버네티커가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말을 하게 되고 갑자기 사이버네틱스의 사이버네틱스 혹은 2차 수준의 사이버네틱스가 성립됩니다. 1차 수준의 사이버네틱스는 주체와 객체를 나눕니다. 그리고 '저기 바깥에 있는' 말하자면 독립적이 세계를 가리킵니다. 2차 수준의 사이버네틱스 혹은 사이버네틱싀 사이버네틱스는 자기 순환적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관찰하고자 하는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자신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뭔가를 기술하는 전체 상황이 다른 영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서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관찰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발명품 183)

관찰자(관찰자라는 개념)를 사이버네틱스로 도입하고 진부하 실재론적, 기계적 입장으로부터의 작별을 끌어들인 것은 바로 당신의 생각이었지요.

결정적인 것은 2차 수준의 사이버네틱스에서 전체 언어가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관찰과 독립적인 세계에 대한 준거가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시에 의해 대체됩니다. 기술은 항상 자기기술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언어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하던지 간에) 행하는 관찰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성찰 역시 다른 차원을 얻게 됩니다. 왜 우리가 뭔가를 알려고 하고 경험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하기 시작합니다. 인식의 문제를 다루는 인식이론가들은 2차 수준의 사이버네틱스의 관점에서 항상 '도대체 인식을 인식하는 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인식의 과정을 밝히려는 노력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인식론을 인식론적으로 정당화하려 합니다. 실험에 대해 갖게 되는 생각도 2차 수준의 사이버네틱스의 관점에서 달라집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 이미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답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당연히 모든 인식의 관찰자종속성을 언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사이버네틱스의 사이버네틱스 혹은 2차 수준의 사이버네틱스에 대해서 말해집니다. 그런 개념들은 특히 당신의 연관점인 사이버네틱스 분야를 위해서 타당합니다. 그러나 모든 진술들의 관찰자종속성에 대한 사고는 당연히 훨씬 더 일반적인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주체와 객체의 결합, 그러한 밀접한 관계는 늘 있어왔으니까요.

그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1차 수준의 개념들과 2차 수준의 개념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겁니다. 1차 수준의 개념들은 외적인 것이 되는 그런 세계에 대한 외견상 객관적인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고 2차 수준의 개념들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됩니다. 그런 개념들은 주체와 객체의 엄격한 구분, 관찰자와 관찰대상간의 엄격한 구분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의식 혹은 인식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의식과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관찰은 관찰자를 필요로한다고 말하면 좀 분명할 겁니다. 세계를 지각하는 일은 세계를 지각하는 사람을 요구합니다. (184)

2.

이것이 결정적인 점입니다. 내 연구의 대상, 그와 동시에, 불가피하게, 내 연구의 수단은 관찰자입니다. 실로 우리는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나누는 전통적인 분리를 대체하는 순환적인 상황 속에 얽혀 있습니다. 나는 '관찰자와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나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아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관찰자를 내 사고의 출발점으로서 이용합니다. 어떠한 존재론적 전제도 두지 않은 채 말입니다. 단지 관련된 질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서 그렇게 할 뿐입니다. 어떠한 고차원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어떠한 존재론적 토대도 없습니다. 어떠한 보편타당한 정당화도 없습니다. 관찰자는 관찰하며, 무엇을 보며, 그것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부정합니다. 관찰자는 자신이 '하는' 것을 '합니다.' 그에게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념의 문제이지 확실한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함으로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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