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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뚜라나 <있음에서 함으로>

교육1.

T1000.0 2019. 11. 8. 19:37
1.

칸트는 자신의 논문 <교육론>에서 어떤 근본적인 역설이 교육이라는 넓은 분야를 지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자유롭고 자기결정적인 개인들을 키워내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래의 개인들에게 강의요목을 부과하고 학교에 나오도록 강요하며, 잘못한 것이 있으면 벌을 주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핍박한다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칸트를 따른다면, 교육적 노력의 목표와 수단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긴장관계가 놓여 있어서 서로 모순된다는 겁니다. 이에 동의하십니까?

아닙니다. 교육, 즉 관찰자의 논평이란 성인들(교사들)과의 공존으로부터 나오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성인들로 생성되는 겁니다. 이는, 만일 자유롭고 자기결정적인 사유가 교육적 활동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다른사람의 자율성에 대한 상호존중이 바탕이 되는 방식으로 함께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내 견해로는 칸트가 정식화한 역설이란 존재하지 얺습니다. 삶의 방식, 더불어 살기의 방법이 사람들을 형성하고 변형시킵니다. 만일 당신이 자율과 성찰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 방법으로서 폭력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성찰과 행동을 함께 하기 위한 열려진 공간을 창출해야합니다. 목적과 수단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함으로 207)

2.

강요란 교사들이 자신의 교육자료를 흥미를 유발하는 방식으로 제시하지 못했을 때, 그리고 학교를 더불어 존재하는 매력적인 장소로 만들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법입니다. 교사들의 실패가 폭력을 낳는 것이지요.


만일 교사가 존경스럽게 행동한다면, 만일 그가 자신의 학생들을 윽박지르지 않는다면, 만일 그가 학생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협력과 성찰을 북돋워준다면, 그때 특별한 형태의 상호작용이 출현할 것입니다. 가르침의 목표를 포함해서, 교사가 실천하는 삶의 방식은 학생들의 입장에서 유익한 배움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세 가지 물음들과 과제들이 교육에서 협력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첫째, 내가 볼 때에는, 선택되어야 할 교육 이념에 관해 토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학생들은 과연 어떤 미래의 성인들로서 졸업해야 할 것인가? 민주적인 정신을 가지고 책임감있게 행동하는 시민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권위적이고 남을 통치하려는 고관들,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하여 우월감을 느끼는 지배자들이 되어야 하는가? 둘째 그와 같은 이념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삶의 방식을 학교에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망되는 목적들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도록, 즉 자신들이 성취해야 하는 것을 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사들을 준비시키는 필수적 과제가 있습니다.(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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