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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기 자신에게 복종을, 순수이성에게.
'권력은 복종을 통해 출현한다'는 테제에서 그 복종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일 뿐이란 명분을, 국가에 제공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었다는 것이 놀랍다. 권력의 시녀 역할을 종교가 철학으로 이제 사회학이 대체하다니. 허나 역시 중요한 것은 유연함, 건강이다. (T1000.O)
1.
국가와 이성, 국가와 사유의 동맹을 통해서 "모든 것들은 입법자와 주체 주위를 회전"하게 됩니다.(천의고원2 159) 국가의 입장에서는 사유를 허용하는 형식적 조건들 아래에서 입법자와 주체를 구별해야 하지만, 이것은 바로 그 양자의 동일성을 개념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복종하라, 항상 더 많이 복종할수록 더 많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복종이란 순수이성에게, 바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천의고원2 159) 이것이 그 근대적인 주체화 체제의 가장 결정적인 정언명령입니다. "네가 입법자로서 법에 복종하는 것은, 네가 계약에 의해서, 네가 뽑은 사람들에 의해서 정해진 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다른 외부의 누구가 아니라 너 자신, 너 자신의 내적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성의 명령에."
이것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 하기에"라는 말로 요약되는 칸트적인 도덕철학의 핵심이기도 하지요. 들뢰즈는 칸트에 이르러 선과 법의 관계가 뒤집힌다고 하면서, 그것이 근대적 법과 도덕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도덕과 법의 관계에 대해 이전까지의 통념은, "법이란 그것이 선한 것이기 때문에 법이 된 것이다"였는데, 반대로 칸트는 선한 것은 그것이 보편타당성의 형식이기에 , 다시말해 법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 하기에"라는 명제나, "너의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타당한 입법의 원칙에 부합하도록 행동하라"는 칸트의 도덕철학의 정언명령은 바로 이런 사태를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2.
"철학이 스스로에게 근거의 지위를 할당한 이래로, 그것은 기존 권력에게 축복을 내렸으며, 국가권력의 기관들에 자신의 분과 원칙을 베껴왔다"(천의고원2 159)고 저자들이 말하는 사태는 바로 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칸트가 가령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기획을 , 이론 이성인 '순수이성'을 비판의 법정에 세우는 것이라고 말할 때, 다시 말해 법정이라는 국가적 심급의 은유를 빌려올 때, 혹은 마치 법정이나 국가기관이 심급을 나누는 것처럼 이성을 여러 개의 심급으로 분할할 때, 그 분할의 동형성이 있든 없든 간에 이런 법적이고 국가적인 모델이 철학 자체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헤겔의 철학이 이성에 절대적 지위(절대정신)를 부여한 것과 나란히, 프로이센 국가로 응집되는 역사와 현실에 그 절대이성의 지위를 부여했다는 사실 또한 지적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의 경우 철학자가 국가"공무원'이 되고, 사유와 학문을 관리하는 대학총장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분명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편 현대에 이르면, 이처럼 이성과 사유를 '관리'하는 철학자가 국가장치에서 차지한 위치(국가철학자)를 사회학자들이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일 겁니다. 혹은 한때 미국 사회학을 지배하던 파슨스 같은 사람도 그런 경우라고 하겠지요. (노마디즘2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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