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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의 유학자 퇴계 선생의 맏아들 이준의 아내는 봉화금씨였다. 퇴계는 맏며느리를 맞을 때 상객으로 사돈댁에 갔는데, 사돈댁 집안 사람들로부터 미천한 가문이라며 외면과 홀대를 받았다. 당시 봉화금씨 집안은 5대에 걸쳐 벼슬아치들이 이어져 명성이 드높은 집안이었다. 퇴계가 맏아들의 혼례를 끝내고 사돈댁을 떠나자, 봉화금씨 일가 친척들이 몰려와 이렇게 따져 물었다.
“우리 가문의 규수는 어느 명문가에라도 시집을 보낼 수 있는데 하필이면 진성이씨 같은 한미한 집안에 시집을 보낸단 말이오? 그런 사람이 이 집안에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문을 더럽힌 셈이오.”
그러면서 퇴계가 앉았던 대청마루를 물로 씻어내고 대패로 깨끗이 밀어버렸다고 한다.
후에 그 이야기가 퇴계 집안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모욕감을 느낀 퇴계 문중에서 들고 일어나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며 야단이었다. 그때 퇴계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사돈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지 우리가 관여할 바 아닙니다. 가문의 명예는 문중에서 떠든다고 높아지는 것도, 남들이 헐뜯는다고 낮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가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도 예를 지키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형편없는 가문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며느리를 맞았으니 그런 하찮은 일로 말썽을 일으키면 새 며느리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니 그만두시지요.”
퇴계는 사돈댁의 괄시를 일체 불문에 부치고 새로 맞이한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금씨 며느리는 시아버님의 넓은 도량과 덕에 크게 감동하여 한평생 높이 받들어 모시다가 훗날 퇴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시아버님 생전에 내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죽어서도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나를 시아버님 묘소 아래에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금씨의 묘는 지금도 퇴계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있다.
이처럼 사돈댁의 괄시를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고 지극히 아껴주시는 시아버지의 인품에 감복한 봉화금씨는 내조의 덕을 쌓고 지극한 효행으로 한 가문의 명예를 빛나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훗날 퇴계 선생의 비문은 당시 선성삼필宣城三畢로 이름 높았던 봉화금씨 집안의 금보(琴輔, 퇴계 선생의 백형 潛의 손녀사위)가 쓰는 등 두 가문의 정리情理는 그 후 더욱 돈독해졌다. 그리고 퇴계 선생의 사돈인 훈도 금재琴梓의 두 아들도 퇴계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2.
당신이 해변을 따라 산책을 하고 있다가 별안간, 한 아이가 파도 때문에 바다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갑자기 발견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때 당신이 물속으로 달려 들어가 아이가 물에 빠져 죽지 않도록 구해낸다면, 당신은 사랑의 발로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아이를 불러서 그 아이를 꾸짖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활동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 아이가 느꼈을 두려움에 주목하지 않고 오직 당신 자신의 불안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그 순간 당신의 활동들을 지배한 감정은 당신 자신의 두려움입니다. 그 아이 나름의 적당한 지각에 기초해 취할 수 있는 행위는, 그 아이의 공포를 줄여주고 해변을 안전하게 돌아다니는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 그 아이를 달래주는 일일 것입니다.(함으로 320)
T.
퇴계 이 황은 아마도 사랑에 대한 성찰이 깊은 분이었던 같다. 문중의 노여움에 대처하는 방식도 며느리를 보호하는 방식도 그리고 사돈댁에 대한 대처도 어디 곳하나 마음의 상처 하나 없이 사랑으로 아우른다. 감동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값진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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