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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사람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즉 인간-에게 지시명령적 간섭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어떤 통찰이나 체험과 맞탁뜨렸을 때 그러한 체계가 어떠한 행위를 보일지 엄밀한 정밀성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함으로 186)
2.
결국은 모두 심리적 위안의 문제입니다. 스님이라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그 결정에 위안이 좀 되는 겁니다. 저울대가 왔다갔다할 때 스님이 한쪽을 살짝 눌려줌녀 그렇게 기울어집니다. 그런데 확연히 반대쪽 무게가 무거우면 스님이 이쪽을 아무리 눌러도 절대로 따라오지 않아요. 그래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는 거에요. 제가 해 보니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법문 듣고 좋아졌다고 해도 제 덕이 아니라 모두 자기 근기, 자기 복입니다. 제 말을 듣고 따라서 변한 것이 아닙니다. 고만고만한 경지에서 간당간당 흔들릴 때 살짝 거들어준 것 뿐이에요. 아예 얼토당토않은 상태라면 제가 아무리 깨우쳐주려 해도 못 깨칩니다. 자기 생각에 꽉 사로잡혀 있으면 관세음보살 진신과 3년을 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깨우쳐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깨어있기 102)
2.
당연히 모든 치료사들은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설령 그들이 자신들이 정확하고 목적지향적인 방식으로 테크닉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할지라도, 바라는 효과들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그 치료실을 벗어난 자신의 잠재적인 치료 효과들을, 그 치료실에서 창조된 이미지들, 대화들, 체험들의 세계와는 구별되는 인간관계들의 영역 속에 펼쳐 놓기만 할 것입니다. 치료사들이 가질 수 있는 인간 변화의 의도들 및 이론들은 예언적 성질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찰들과 소망들이 개별적인 환자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들의 영역 속에서 직접적으로 실행될 수도 없고 특정한 결과들로 이어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치료사들은 기존 범주들에 따라 사람들을 진찰하면서 그 사람들의 괴로움을 단지 분류할 수 있을 뿐이며, 어떤 식의 조처가 적합할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 지식은 아닙니다.[즉문즉설의 경우] (함으로 187)
다른 사람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즉 인간-에게 지시명령적 간섭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어떤 통찰이나 체험과 맞탁뜨렸을 때 그러한 체계가 어떠한 행위를 보일지 엄밀한 정밀성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함으로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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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모두 심리적 위안의 문제입니다. 스님이라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그 결정에 위안이 좀 되는 겁니다. 저울대가 왔다갔다할 때 스님이 한쪽을 살짝 눌려줌녀 그렇게 기울어집니다. 그런데 확연히 반대쪽 무게가 무거우면 스님이 이쪽을 아무리 눌러도 절대로 따라오지 않아요. 그래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는 거에요. 제가 해 보니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법문 듣고 좋아졌다고 해도 제 덕이 아니라 모두 자기 근기, 자기 복입니다. 제 말을 듣고 따라서 변한 것이 아닙니다. 고만고만한 경지에서 간당간당 흔들릴 때 살짝 거들어준 것 뿐이에요. 아예 얼토당토않은 상태라면 제가 아무리 깨우쳐주려 해도 못 깨칩니다. 자기 생각에 꽉 사로잡혀 있으면 관세음보살 진신과 3년을 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깨우쳐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깨어있기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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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모든 치료사들은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설령 그들이 자신들이 정확하고 목적지향적인 방식으로 테크닉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할지라도, 바라는 효과들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그 치료실을 벗어난 자신의 잠재적인 치료 효과들을, 그 치료실에서 창조된 이미지들, 대화들, 체험들의 세계와는 구별되는 인간관계들의 영역 속에 펼쳐 놓기만 할 것입니다. 치료사들이 가질 수 있는 인간 변화의 의도들 및 이론들은 예언적 성질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찰들과 소망들이 개별적인 환자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들의 영역 속에서 직접적으로 실행될 수도 없고 특정한 결과들로 이어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치료사들은 기존 범주들에 따라 사람들을 진찰하면서 그 사람들의 괴로움을 단지 분류할 수 있을 뿐이며, 어떤 식의 조처가 적합할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 지식은 아닙니다.[즉문즉설의 경우] (함으로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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