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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립문자
- 문자로 규범화하지 않음.
2.
도가도 비상도
-도라고 [규정]하는 도는 이미 도가 아니다.
3.
무유정법
- 정해진 법은 없다.
4.
나는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이건 사랑을 장려할 의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정말로, 사랑이 없다면 사회현상들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은 선생님의 고찰들에서 윤리적 규범을 이끌어내기를 제안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을 창조하거나 보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항상 행동하라.'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규범화는 윤리를 도덕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나는 우리 대화의 이 지점에서, 우리가 윤리와 도덕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비록 이러한 구분이 언뜻 보기에 다소간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해도 말입니다. 도덕론자들은 규칙들의 고수를 지지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진술들과 이상한 생각들에 권위를 부여해 주는 외적 준거로 간주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책임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합니다. 도덕론자로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동시대 인간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규칙들과 규범들을 옹호하는 것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5.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할 법을 가지고 있노라'고, 이 같은 생각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이 같은 생각을 지어서는 아니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자라. 내가 설한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 수보리야! 법을 설한다 해도, 설할 법이 아무것도 없나니, 그래서 비로소 법을 설한다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에,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퍽이나 많은 중생들이 미래의 세상에서 이 법이 설하여지는 것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아니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그들을 중생이라 해서도 아니되고 중생이 아니라 해서도 아니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하는 것은 곧 중생이 중생이 아님을 여래가 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중생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금강경)
5.
<너는 저 열매를 먹지 말라......> 불안에 사로잡힌 무지한 아담은 이 말을 금지의 표현으로 듣는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담이 먹을 경우에 그 아담을 중독시키게 될 과일이다. 그것은 두 신체의 만남, 각각을 특징짓는 관계들이 서로 결합되지 않는 만남이다. 과일은 독처럼 작용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과일은 아담의 신체의 부분들을 (그리고 이에 평행하게 과일의 관념은 아담의 영혼의 부분들을) 그의 고유한 본질에 더 이상 상응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도록 결정할 것이다. 신은 그에게 단지 과일의 섭취가 낳을 자연적 귀결을 드러냈을 뿐인데, 아담은 원인들을 모르기 때문에 신이 자신에게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금지한다고 믿는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우리가 악, 질병, 죽음의 범주 아래 집어넣고 있는 모든 현상들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나쁜 만남, 소화 불량, 중독, 관계의 해체.(스피노자의 철학 p38)
불립문자
- 문자로 규범화하지 않음.
2.
도가도 비상도
-도라고 [규정]하는 도는 이미 도가 아니다.
3.
무유정법
- 정해진 법은 없다.
4.
나는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이건 사랑을 장려할 의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정말로, 사랑이 없다면 사회현상들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은 선생님의 고찰들에서 윤리적 규범을 이끌어내기를 제안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을 창조하거나 보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항상 행동하라.'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규범화는 윤리를 도덕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나는 우리 대화의 이 지점에서, 우리가 윤리와 도덕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비록 이러한 구분이 언뜻 보기에 다소간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해도 말입니다. 도덕론자들은 규칙들의 고수를 지지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진술들과 이상한 생각들에 권위를 부여해 주는 외적 준거로 간주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책임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합니다. 도덕론자로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동시대 인간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규칙들과 규범들을 옹호하는 것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5.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할 법을 가지고 있노라'고, 이 같은 생각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이 같은 생각을 지어서는 아니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자라. 내가 설한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 수보리야! 법을 설한다 해도, 설할 법이 아무것도 없나니, 그래서 비로소 법을 설한다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에,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퍽이나 많은 중생들이 미래의 세상에서 이 법이 설하여지는 것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아니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그들을 중생이라 해서도 아니되고 중생이 아니라 해서도 아니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하는 것은 곧 중생이 중생이 아님을 여래가 설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중생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금강경)
5.
<너는 저 열매를 먹지 말라......> 불안에 사로잡힌 무지한 아담은 이 말을 금지의 표현으로 듣는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담이 먹을 경우에 그 아담을 중독시키게 될 과일이다. 그것은 두 신체의 만남, 각각을 특징짓는 관계들이 서로 결합되지 않는 만남이다. 과일은 독처럼 작용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과일은 아담의 신체의 부분들을 (그리고 이에 평행하게 과일의 관념은 아담의 영혼의 부분들을) 그의 고유한 본질에 더 이상 상응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도록 결정할 것이다. 신은 그에게 단지 과일의 섭취가 낳을 자연적 귀결을 드러냈을 뿐인데, 아담은 원인들을 모르기 때문에 신이 자신에게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금지한다고 믿는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우리가 악, 질병, 죽음의 범주 아래 집어넣고 있는 모든 현상들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나쁜 만남, 소화 불량, 중독, 관계의 해체.(스피노자의 철학 p38)
6.
진리개념을 구해 보려는 당신의 시도는 제게 소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규제적 의미에서의 진리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진리가 무엇이며 무엇이 얻어질 수 있으며 무엇이 추구되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전제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생각이 초래하는 파괴적인 결과들은 건드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됩니다. 어찌됐건 사람들은 저기 어딘가 지평선에 어른거리는 영원한 진리에서 출발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추구해야 할 (지향해야 할)규범이라는 개념 역시도 이미 적응으로의 비밀스러운 강요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규범에 복종해야 한다는 그런 강요 말입니다. (발명품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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