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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의 고원들

명사에서 동사로

T1000.0 2013. 1. 18. 09:13

생과 멸을 통해서 무위법無爲法으로 있는 차별법을 살펴봅시다. 생이란 어떤한 것이 일어남을 이야기하고 멸이란 어떠한 것이 사라짐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어떠한 것'이라는 명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생과 멸이라는 동사가 항상 동반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명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명사가 가리키는 것이 무상이며 무아인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곧 명사인 무엇의 생멸이 아니라 동사인 생멸의 쉼없는 무엇 되기가 진여,공의 끊임없는 자기 변화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그대로 진여, 공의 표현인 것에서의 생멸입니다. 이를 <반야심경>에서는 색色 그대로 공空이며 공 그대로 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고정된 대상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바꿔말하면 인식이 대상을 고정하면서 실체를 만들기 때문에 생멸 그대로 불생불멸인 진여를 잃고 생상[生相:생의 명사화]과 멸상[滅相:멸의 명사화]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진여인 무상의 흐름이 시공의 제한된 인식으로 업화업화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 결정된 상상, 곧 자성자성을 갖게 됩니다.

자성을 갖게 되면서 마음이 닫히게 되고 번뇌가 뿌리를 내립니다. 여기에서 생도 없고 멸도 없는 시간 밖의 영원성만을 세우게 되고 현실의 삶이 그 진정한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자성을 갖지 않는 생멸의 덧없는 찰나가 그대로 공성공성의 자기표현일 때, 지금 우리의 일상이 해탈의 모습으로 긍정되면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선禪의 표현이 됩니다.[각주:1]

 

 

T1000.0 : 니체가 든 예처럼 '번개가 친다'에서 번개가 따로 있어 번개가 치는 것이 아닌 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번개가 있어 번개가 치는 것으로 표상한다. 번개를 명사화 또는 주체화하여 인식한다. 우리의 몸맘말은 이렇게 명사화하여 인식하지만 실상은 명사가 아닌 동사임을 바로 알고 불가피한 명사화를 허상으로 보아야한다. 안쓰면 굳어지는 근육처럼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 상에 명사화는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번개를 동사로 보는 것은 나를 명사가 아닌 동사로 보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번개가 그렇듯이 나라고 생각하는 명사 '나' 또한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있어 생멸이 아니라 생멸의 쉼없는 무엇되기가, 이 복수의 무엇되기들을 이름붙여 '나'라고 하면 여기서 나는 어느 순간에도 명사에서 동사로 보아야한다.         

 

 

  1. 정화스님풀어씀, <법성게> p8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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