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푀르크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요?
마뚜라나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체험했는지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식을 잃는 과정을 관찰할 준비가 되자 나는 내 몸에서 모든 느낌을 잃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몸이 없었지만 살아 있으며, 거룩한 푸른 우주에서 - 온 방을 조용하고 고요하게 떠도는 가녀린 연기처럼 - 점차 사라져 간다는 의식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장업한 푸름 속으로 풀어지는 것 같았고, 녹는 것 같았으며, 모든 것과 함께 있는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머리가 아팠으며 메스꺼웠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고,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이 굉장한 체험이 의미하는 건 뭘까?'라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신을 본 것이었을까?' 신비한 체험이었을까? 아니면 죽음에 이르는 길을 경험한 것일까?' 그 이후로 몇 주 몇 달 동안 나는 당시 '근사 죽음' 체험들이 담긴 책들을 몇 권 읽었고 의학 문헌들과 신비 문헌들을 공부했습니다. 내가 모든 상이한 해석들이 들어 있는 매우 얇은 선을 걸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의학 서적들을 읽고 거기에 담긴 진술들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내가 죽는 것과 비숫한 것을 체험했고, 두뇌에 혈액이 불충분하게 공급됨으로써 생기는 결과들을 체험했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가 신비 문헌들을 믿었다면, 내 체험은 신과의 마주침, 그리고 존재의 총체성과의 통일을 함축했을 것입니다. 당시 나는 나한테 일어났던 이를 '근사 죽음'체험으로 풀이한 의학적 해석을 선택했습니다.
마뚜라나 어쨌든 그것은 나의 삶을 변형시킨 체험이었습니다. 이 변형과 의식 확장의 요소는 나의 체험에(어릴 때에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아서 두 해석들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정신적인, 신비적인 차원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나는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그만두었고 내 자신을 그것들과 부당하게 동일시했던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죽음과 마주침으로써 나는 내가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더 성찰적이게 되었고 덜 교조적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나 자신을 '모든 세속적인 유대를 초월하는 영광스런 존재'로 서술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은 너무 강렬했고 그래서 나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순간적임을, 오직 변이일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옹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붙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있음에서 함으로> p17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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