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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구게2

불립문자로 말하기

T1000.0 2021. 2. 5. 06:37

그때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사람을 뺏고 경계를 뺏지 않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임제스님이 대답했다.
"햇빛이 따스한 봄날에 만물이 발생하여 대지에는 비단을 깐 것 같고, 어린아이가 머리카락을 내려 뜨리니 하얀 실과 같다."
스님이 질문했다.
"경계를 빼앗아 버리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임제스님이 말했다.
"왕의 명령이 이미 천하에 두루 행하여지는 태평의 시절에는 전방 요새에 있는 장군도 전쟁을 하지 않아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는다."
스님이 질문했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임제스님이 말했다.
"병주幷州와 분주汾州의 신의를 끊고 지금은 독립하여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스님이 질문했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은 어떤 경지입니까?" 임제스님이 대답했다.
"왕이 궁전의 보전에 오르고, 들력의 늙은 농부는 태평가를 부른다."(임제어록 72)

2.
우화, 풍자, 유추, 이야기 등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은 암덩어리와 같이 도처에 잠입한 인과론적 사유에 의해 유감스럽게도 추방된 설명원리들입니다. 예수도 자신의 말에 강조와 권위를 부여함에 있어서 인과성에 대해서 말한 적 없습니다. 그는 시각적인 표현들로 말했고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는 낙타와 부자들 간의 어떤 인과적 관계도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추와 우화 그리고 이야기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이해했습니다. 문제는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형식과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인과론적 사유의 사회적 주입력 및 권력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원인과 결과의 결합을 무조건적으로 믿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들에 대한 끔찍하게도 단순한 표상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 분석가능하지도 않고 따라서 모든 것이 인과론적 사유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놀라움, 기적, 경이롭게 보이는 사건은 늘 있습니다. (발명품 84)

3.
옛날에 어질고 현명한 왕이 있었다. 연일 국정에 몰두하던 왕이 모처럼 짬을 내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아침 일찍 떠났다가 저녁에 환궁할 요량이었는데, 사냥에 심취한 나머지 미처 해가 기우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날이 너무 어두워 궁궐까지 돌아갈 수가 없었다. 충직한 신하들은 애가 탔다. 왕이 말했다. 저기, 저 민가에서 하루 묵도록 하자. 신하들은 펄쩍 뛰며 두 팔을 내저었다. 어떻게 전하께서 누추한 여염집에 들 수가 있겠느냐며, 밤길을 재촉해서라도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때 왕이 말했다. 내가 저 집에 들어가면, 내가 백성이 되겠느냐 아니면 저 집이 궁궐이 되겠느냐.

어느 날이었던가, 한 신도가 '한국 물정에 어두운' 그에게 직언을 했다. 이곳 사정을 잘 모르셔서 그런 모양인데, 선생님, 인터뷰나 기고를 하실 때 매체를 가려가면서 하세요. 저희처럼 젊은 사람들도 매체를 얼마나 가리는데요, 라고. 그러자 선생은 허허, 웃으며 앞에 소개한 우화를 들려주었다. 그날, 구석 자리에서 술잔이나 비우고 있던 나는, 그 짧은 대화에서 박상륭이라는 '그릇'의 크기를 새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문학동네 20호, 1999년 가을, <박상륭 인터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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