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붙들고 괴로워하는 것도 모자라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염려해 안절부절 못합니다.
이를 두고 미래가 불확실한 탓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두려움의 실체는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미래의 일로 걱정하는 현재의 내 마음 속에 두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두려움은 알 수 없는 미래에 있는 게 아니라 미래를 걱정하는 현재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런 미래에 대한 감정 역시 현재의 내가 짓는 망상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지나간 과거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지금 이 순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눈팔 틈 없이 집중해야 하는 시간은 미래도 과거도 아닌 바로 현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현재를 놓치며 삽니다. 과거를 생각하다 현재를 놓치고 미랠르 걱정하느라 또 현재를 놓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현재란 없습니다. 그런 삶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지금 이 시간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면 현재가 쌓여 미래가 되어가는 이치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2.
그렇다면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마음에는 본질적 실체가 있을까요? 지금 일어나는 괴로움과 직면해서 그 본질을 찾아나나다 보면 거기에도 또한 아무런 실체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재의 마음도 하나의 허망한 움직임일 뿐입니다.
마음은 매순간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이것이 마음이다'하고 내놓을 만한 실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사실 내 속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분별을 일컫는 다른 이름입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두렵다, 슬프다, 외롭다 하는 갖가지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번뇌일 뿐 입니다. 일체유심조. 이 모든 게 다 내 마음이 지어내는 일입니다.
(금강경 강의 341)
T.
인간에게 공포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불확실성을 꼽는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생각이 두려움의 실체일 것이다. 그런데 두려움에는 근본적으로, 사랑의 결핍이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마뚜라나의 생각을 쫒아가면, 존재의 기본적인 조건은 신뢰다. 태양이 내일 또 뜰 것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처럼 "아기가 태어날 때, 아기의 안녕을 보살펴 줄 엄마와 아빠가 있을 것이라는 점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실존이 기초하고 있는 이런 암묵적 신뢰는 끊임없이 좌절된다."
좌절을 부분적으로나마 과거에 경험한 바 있으면 미래에 대한 신뢰는 불확실해지기 마련이다. 만일 아기가 의심하지 않는 아빠 엄마의 사랑이 좌절되지 않는다면 이 암묵적인 신뢰가 돈독하다면, 미래는 불확실하지 않으니 자연히 두려울 것도 없다. 사랑의 결핍이 커질수록 불확실성은 커지고 두렵다. 이 두려움을 생각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기엔 공허한 구석이 있다. 불확실성은 물론 내 마음이 짓는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이란 내가 지은 인연의 총체가 아닌가.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은 어떨까. 엄마의 역할을, 아빠의 역할을, 오늘 하루 나의 역할을 다하면서 사랑의 결핍을 채워나가는 건 어떨까.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나의 실천이 불확실해지지 않는 길이 아닌가.
2.
선생님은 예전에, 모든 질병의 99퍼센트가 사랑의 결핍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아 선생님이 틀릴 수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오직 97퍼센트만이 그럴 수 있겠지만 틀림없이 그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사랑의 결핍과 질병 사이에 어떤 연결관계가 있다고 보는지요?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은 신뢰입니다.
나비가 자신의 번데기를 벗고 나왔을 때, 나비의 날개와 더듬이, 몸통과 전체 몸의 상태는, 공기와 기운을 북돋워주는 바람, 그리고 꿀을 빨 수 있는 꽃들이 있을 것이라고 신뢰합니다. 나비와 세계 사이의 구조적 상응은 암묵적인 신뢰의 표현입니다.
하나의 씨앗이 젖어들어 싹을 틔우기 시작할 때, 씨앗은 모든 필요한 영양소들이 자기가 성장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신뢰합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아기의 안녕을 보살펴 줄 엄마와 아빠가 있을 것이라는 점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실존이 기초하고 있는 이런 암묵적 신뢰는 끊임없이 좌절됩니다.
꽃들은 살충제에 중독되고,
씨앗들은 물이 부족하고,
이 세상에 사랑스러운 존재로 태어난 아기는 사랑을 받지 못하며, 또 자신의 존재의 측면에서 배려되지 못하고 부정됩니다.
타자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질병을 낳는 것이라고, 말하자면 유기체들 내부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존재 상황들과 맺는 관계에서 모두 유기적 조화를 상실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함으로 323)
'나의 사구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의 초대 (0) | 2021.01.14 |
---|---|
사랑의 마음가짐 (0) | 2021.01.14 |
공에 대한 여러가지 접근 요약 (0) | 2021.01.13 |
신통력의 무능력 (0) | 2021.01.13 |
깊은 사랑의 본보기, 이 황의 사랑 (0) | 2021.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