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뫎연구

사랑의 생물학

T1000.0 2020. 12. 17. 13:27

1.

생물학적으로 보아 사람다움의 독특함이란 오직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사회적 구조접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을 통해 한편으로 인간의 사회적 역동성에 고유한 규칙성들, 예컨대 개인의 정체와 자기의식이 산출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삶의 재귀적인 사회적 역동성이 산출된다. 이 역동성의 일부인 성찰에 힘입어 우리는 우리가 사람다운 존재로서 가질 수 있는 세계란 타인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뿐임을 알게 된다.

2.

나아가 생물학은 우리가 인지적 영역을 넓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란 예컨대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때, 낯선 이를 나와 같은 이로서 마주할 때, 더 직접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생물학적 일치를 체험할 때 등이다. 사람들 사이의 생물학적 일치 때문에 우리는 타인을 볼 수 있고, 또 우리 곁에 타인이 있을 자리를 비워둔다. 이런 행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사랑이라 부르기도 하고, 좀 약하게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내 곁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현상들의 생물학적 기초다. 사랑 없이, 타인을 받아들여 우리 곁에서 살도록 놓아두는 일 없이, 사회적 과정과 사회화, 나아가 사람다움이란 있을 수 없다. 남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모두 (경쟁적 사고방식에서 진리의 소유, 이념적 확신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과정을 산출하는 생물학적 과정을 해치고 사회적 과정을 해친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도덕적이 설교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설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분명히 하려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사랑없이, 남을 받아들임 없이 사회적 과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사랑 없이 함께 산다면, 무관심한 위선자의 삶이거나 심지어 남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삶인 것이다.

3.

사랑이 사회적 삶의 바탕임을 부정하고 거기 담긴 윤리적 의미를 무시한다면, 생물로서 35억여 년을 살아 온 우리의 역사가 가리키는 것 모두를 잘못 봄을 뜻한다. '사랑'이란 개념을 자연과학의 맥락에서 쓰는 일이 이상하게 여겨지고, 문제를 살필 때 합리성과 객관성이 깎일까 해서 저항감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 밝힌 것들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근거 없는 걱정일 뿐이다. 사랑은 뿌리 깊은 생물학적 역동성의 하나다. 사랑은 유기체의 한 역동적인 구조양식을 규정하는 감정으로서, 사회적 삶의 작업적 응집성을 낳는 상호작용들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단계다. 감정(두려움, 노여움, 슬픔 등)은 모두 뿌리 깊은 생물학적 역동성으로서 저마다 특정 구조양식을 규정한다. 따라서 감정들은 서로 다른 영역의 작업적 응집성(달아남, 싸움, 물러남 따위)을 낳을 수 있는 상호작용들로 나아가는 단계들이다.

 

4.

인식과 행위의 동일성을 부정하고, 모든 인식이 곧 행위이며 또 모든 인간적 행위는 언어 안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윤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사람다움의 문제이며, 여기서 부정이란 근본적으로 사람을 생물로 보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면 자기기만이다. 어느 영역에서 무엇을 하건, 걷기처럼 구체적이든 철학적 성찰처럼 추상적이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는 우리의 온몸이 함께 얽혀 있다. 모든 행위는 우리의 구조적 역동성과 구조적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난다. 우리가 하는 것은 모두 다 공존의 무용각본에 따른 구조적 춤이다.

 

5.

그러므로 우리가 이 책에서 서술한 것들은 자연과학적 탐구의 한 바탕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사람다움을 이해하기 위한 바탕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서 마주친 사회적 역동성은 이제는 그저 가정에 머무르지 않는 인간 조건의 한 존재론적 근본특징을 암시함다. 곧 우리가 가진 세계란 오직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 뿐이다. 그리고 오직 사랑의 힘만으로만 우리는 이 세계를 산출할 수 있다.

(앎의 나무 276~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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