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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집착도 마음이 만든 허상이며, 열반을 취하려고 하는 것 또한 마음이 만들어 낸 허물입니다. 생사를 떠나서 열반이 없고 열반을 떠난 생사도 없으니, 생사의 세상을 떠날 이유도 없고 열반을 희망으로 가질 까닭도 없습니다.
무상한 세상 그대로가 본래 열반의 정토이며 머묾 없는 무상이 부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현존現存이니 머물 것도 없고 갈 곳도 없지요. 머물려 하거나 가려고 하는 것이 정토와 열반과 지혜를 가로막습니다.
마음을 바꾸어 지혜가 된다고 하지만 본래 바꿀 마음이 없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바뀐 마음이며, 생사를 떠나 열반이 있다고 하지만 본래 생사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열반의 세계입니다.
중생을 바꿔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는 것을 아는 법계의 마음이 중생과 부처를 넘어서는 마음이 되니, 중생 그대로 부처이면서 중생이며, 부처도 중생이면서 부처이므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지요.
지止수행으로 세상에 집착할 것도 없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열반만을 희구할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며, 관觀수행으로 이웃과 손잡고 함께 자애를 나누는 선근과 대비심을 일으켜야 대승에 대한 신심을 성취할 수 있고 구경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하나에서 보면 너무나 작은 '나'같지만 이웃 생명들과 함께 인연을 이루고, 이루어진 인연의 장에서만이 '나'라고 할 수 있으므로 생사生死가 곧 열반涅槃이 됩니다. 무상無相 속에서 함께 열반을 드러내는 고요한 생명 나눔이 '나'가 되므로 자비로 열반을 실천하는 '관觀수행'이 스스로의 진면목인 대승의 삶을 드러냅니다. 생명들의 자비 실천이 생명이 되는 것이니 '생명'과 '자비 실천'은 하나입니다. 1
- <대승기신론2> p43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