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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된 나가 사라진 자리[止心]에 한없이 커진 생명들의 인연을 나로 삼는 실천 의지[觀心]가 지관지관을 함께 닦는 수행입니다. 분별심이 사라진 만큼 익어진 지수행이 '관수행'의 바탕이 되며, 자비의 실천인 관수행은 나의 분별을 넘어서게 하여 '지수행'을 돈독하게 합니다.

'마음 비움[止]'과 마음 나눔[觀]'은 수행의 두 바퀴로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살라는 것이니 언제나 함께 익어가면서 수행을 완성시킵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일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삶의 본바탕이 지지인 '마음 비움'과 '마음 나눔'입니다.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한 모습의 두가지 실천입니다.

그렇기에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깨달음의 길에 온전히 들어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분별심의 '나'를 넘어서는 곳에서 이웃과의 생명 나눔인 무분별의 '나'가 실천되고 있는 인연입니다. '마음 비움'과 '마음 나눔'으로 한 발 한 발 걷고 있는 그 길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며 깨달음을 이루어 가는 길입니다.

깨달음에서 보면 크고 작음이 있을 수 없겠지만 분별하는 마음을 비우고 자비의 마음 나눔이 익어지고 있는 것에서 보면 깨달음의 길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커진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 같은 마음씀 하나하나가 깨달음에 대한 습관을 키우므로 깨달음을 증장시킨다고 하겠습니다.[각주:1]

 

T1000.0 : 지와 관, 마음 비움과 마음 나눔의 두 바퀴 함께 굴러야 하듯이 쓰는 말이 다르지만 철학 공부를 할 때도 이론과 실천이 양발이 되어 발걸음을 내딪어야 온전하다. 실천 없는 이론이 공허하고 또 이론 없는 실천이 쉽게 무너지듯 양발이 차례차례 내딪는 발걸음, 두바퀴 함께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나의 판단이 습관적인 인식인 줄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현재의 판단이 과거의 판단을 그대로 답습한 인식의 대물림이 되지 않지요. 대물림된 인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조차 인연의 장에서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면서 다시 새로운 인식이 되어야 합니다.

대물림되고 있는 망념으로 이루어진 아상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 습관을 그치는 것이 '지수행'이며, 뭇 생명 모두가 대승 곧 큰수레를 함께 타고 있는 연기적 자아라고 보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관수행'입니다. 이러한 마음 그침[止]과 마음 나눔[觀]으로 인연을 창조하는 현재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을 습관화하는 것이며, '깨달음은 마음[菩提心]'을 증장시켜 가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습관화한다는 뜻은 '습관화하지 않기'를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길이란 언제나 새롭게 있는 길이며 새롭게 가는 길입니다. 새로움 속에 삼세삼세를 담고서 삼세를 넘어서는 것이 지와 관을 함께 닦아가는 걸음걸이입니다.[각주:2]

 

 

  1. <대승기신론2> p437 [본문으로]
  2. <대승기신론2> p43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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