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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정할 수 없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건 고차원적 본질의 존재, 삶의 의미, 세계의 성립, 사후의 생 등을 다루는 물음입니다. 그런 질문은 있을 법한 수많은 답을 갖고 있습니다.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이게 어떻게 결정됩니까? 만약 물리학자에게 답을 구하면 쉽게 알게됩니다. 모두가 알듯이 백억 혹은 이백억년 전에 빅뱅(근원적 충돌)이 있었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우주가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충돌의 여음으로 여겨지는 미세한 소음을 거대한 초음파 안테나를 통해서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신앙이 깊은 카톨릭 신자에게 묻는다면 천지 창조의 매일 매일을 기술하는 자세한 창조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만약 인도의 힌두교도에게 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그는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어린애들도 알듯이, 한때 거북이 한마리가 있었는데 다른 거북이가 그 위에 올라앉았고 또 그 위에 다른 거북이가 올라갔는데 맨 위 거북이 위에 우주 속 우리가 앉아있다"라고 말이죠. 이 사람 저 사람, 투르크메너족에게, 에스키모에게 질문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서 어떻게 우주가 생겨났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옳은지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은 결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답은 답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뭔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요약하자면,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 제가 뭔가를 말하면 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누가 저에게 거북이에 대해서 얘기하면 저는 '아! 저 사람은 힌두교도이구나'를 압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빅뱅에 대해서 얘기하면 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압니다. 아하! 넌 물리학자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발명품 252)
2.
누가 옳은가, 첫 번째 유아론자인가 아니면 두 번째 유아론자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는군요.
이게 도약 지점입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계속 설명하기 위하여 소위 상대성 원리를 말하고자 합니다.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A에게도 B에게도 옳은 하나의 가설은 그것이 A와 B에게 한꺼번에 타당할 경우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가령 태양이 우주의 중심인가 아니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가라는 물음을 생각해봅시다. 금성에도 지구에도 자신의 행성이 중심에 있다는 가설을 다투는 존재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지구인과 금성인이 만나게 되는 순간 그들은 다투고 전쟁을 시작하게 될 겁니다. 누가 옳은가요? 누가 진리의 소유자입니까? 이 다툼을 조정하기 위해서 상대성원리를 사용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지구인에게도 금성인에게도 그들이 만약 (둘 다에게 타당해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상대성원리를 수용한다면 그들 모두 맞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상대성원리는 그러니까 옳고 그름이 아니고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각자가 내려야할 결정의 문제인 것입니다. 금성인과 지구인은 이제 태양중심주의자가 되기로 그래서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기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며 화성인과도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T.
산을 하나 두고 산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동산이라하고 산 동쪽에 사는 사람은 서산이라고 부른다. 이를 두고 서로 옳다고 싸운다면? 누군가 산을 중심으로 보면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님을 보여준다. 이로써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서쪽 사람들은 동산이라고부르고 동쪽 사람들은 서산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하고 평화롭게 산다.
2. 독도인가 다케시마인가. 섬을 일본 쪽에서는 다케시마라 부르고 한국 쪽에서는 독도라고 부른다. 독도의 영토권을 두고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그들의 주장은 그들의 입장에서 옳을 것이고 한국 역시 그럴 것이다. 사실 독도는 누구의 땅도 아니며 또 그런 이유로 누구의 땅도 될 수 있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결정의 문제임을 직시한다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즉 일본에서 독도를 한국땅으로 생각하도록 여러 노력을 기울이는 것. 한국은 일본을 향해, 또 국제 사회를 향해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평화롭게.
그런데 상대가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입장을 고수한다면 그때도 역시 어디까지 결정할지의 문제.
3.
저는 비밀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밀이란 아직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드러날 답을 갖추고 있을 때 비밀이니까요. 그에 비해서 제가 말하는 결정할 수 없는 물음은 원칙적으로 풀 수 없는 물음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새로운 표현을 발명해내개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언어적 형식을 유지하렵니다. 결정불가능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결정하도록 이끄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선택을 하도록 요청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결정 가능한 물음이란 (어떤 선택 혹은 결정을 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틀을 통해, 보기에 따라서는, 이미 결정된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냥 미리 주어진 게임규칙에 맞추어 대답을 찾으면 되니까요. 저의 형이상학적 준칙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물음들만을 결정할 수 있다.' (발명품 254)
4. (스님의 하루 201128)
다툼이 생기는 이유
여기에 산이 하나 있어요. 산의 서쪽에 사는 사람은 이 산을 동산(東山)이라 부르고, 산의 동쪽에 사는 사람은 서산(西山)이라고 불러요. 그럴 때 각자 부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에 동쪽이거나 서쪽인 것이지, 그 산이 서산이거나 동산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산은 동산이야’, ‘아니야, 그 산은 서산이야’라고 주장하면 이를 두고 ‘아상(我相)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동산이라는 상을 짓고, 서산이라는 상을 지은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저 산은 내가 보기에 동산이야’ 혹은 ‘내가 보기에 서산이야’라고 한다면 우리가 들을 때 ‘아, 저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산은 객관적으로 동산이고, 나는 그 진실을 알았다. 그런데 너는 그걸 서산이라고 하니 너는 틀렸다’
이것이 바로 상을 지은 거예요. 상을 지으면 시비가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닙니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는 진실은 ‘동산’ 혹은 ‘서산’이라는 상을 지은 오류를 시정해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그러면 이 산의 진짜 실체는 비동비서산(非東非西山)이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는 말은 동산과 서산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깨뜨릴 수가 있었는데, 다시 이것을 갖고 ‘비동비서산이 진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이 산의 이름을 ‘비동비서산(非東非西山)’이라고 규정합니다. 진리가 비동비서(非東非西)가 된 겁니다. 그런데 누가 ‘그 산은 동산이야’라고 하면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너는 틀렸어. 너는 아상에 집착한 거야.’
이렇게 시비가 일어납니다. 누가 서산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시비가 일어나요.
‘이건 서산이야.’
‘너도 틀렸어.’
‘그러면 뭔데?’
‘이건 비동비서산이야!’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내가 옳아!’라는 말과 같아요. 이 산은 동산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동산이 아니고, 서산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서산이 아니에요. 그래서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는 언어가 생긴 것이지,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이라고 이름할 수는 없어요. 비동비서산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다시 시비가 생기게 됩니다.
누구는 동산이라고 하고 누구는 서산이라고 하면서 서로 ‘너는 틀렸어. 내가 옳아!’라고 하는 것이나, 동산도 서산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너희 둘 다 틀렸어. 진실은 비동비서산이야!’라고 하는 것이나, 시비는 똑같이 일어난 겁니다.
법상도 짓지 말라는 뜻은 비동비서산이라고도 고정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누가 동산이라고 하면 ‘틀렸다!’ 이렇게 접근하지 않고 ‘아, 저 사람이 이 산을 동산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저 동네에 사는구나’ 이렇게 아는 거예요. 누가 서산이라고 하면 ‘아, 이 사람은 이 동네에 사는구나’ 이렇게 알아버리는 거예요. 옳으니 그르니, 틀렸니 맞니, 이런 시비 분별이 안 일어나고 상대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해 버립니다.
‘어, 저 사람은 저 동네에서 왔구나.’
‘어, 이 사람은 이 동네에서 왔구나.’
이처럼 진리를 바로 알고 있으면 다툼이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진리라는 상을 지으면 ‘너는 진리가 아니야!’ 이런 시비가 일어나게 돼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많은 오류를 시정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몇 백 년에 걸쳐 그 가르침이 전해지면서 후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절대화시켰어요. 언어를 절대화시킨 거죠. 이걸 법상(法相)이라고 해요.
기존의 불교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절대화시켜서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비판하고 새롭게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불교인들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점을 지적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라는 말 들어봤죠? 아(我)라고 하는 것도 없지만 법(法)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겁니다. ‘아상을 짓지 마라’, ‘법상을 짓지 마라’ 이것과 같은 말이에요.
우리는 일상생활을 할 때 부처님이 뗏목의 비유를 들어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태워다 준 뗏목도 강을 다 건넜으면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어요. 이 말은 뗏목만 버리라고 강조한 게 아니라 다른 것도 다 버리라는 얘기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집착하면 안 되는데 하물며 세상의 다른 온갖 얘기는 말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셨어요?”
“네, 이해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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