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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볼 때는 객관성과 책임감 있는 행위의 관계는 정확히 거꾸로 살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인식된 객관적 진리를 지침으로 삼는다는 것은 책임감 있는 참여의 토대를 상당 부분 형성하는 것으로 말이지요.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이러이러하니까. 예를 들면, 자연파괴가 실제적으로 진행되니까,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식이죠. 또 거꾸로, 객관적으로 인식 가능한 실재에 대한 이념으로부터 결별한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는 식의 합리화로 해석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도 더 이상 실제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당연합니다. 괴테의 아름다운 시 '산꼭대기 너머에는 안식이 있다' 역시 수십만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 예수의 '누가 한 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내밀어라'는 말도 사람들의 빰을 때리라는 요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요. 일정 기간 동안 늘 다른 쪽 뺨도 내밀어 주게 되면 사람들은 용기를 얻어 뺨을 때리게 되고 그러고는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니까요.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모든 것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소위 해석학적 근본이념 혹은 청자(듣는 사람)의 해석학입니다. 어떤 진술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말하는 이가 아니라 듣는 이라는 청자의 해석학 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객관적 인식의 거부가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는 것에 대한 정당화로 여기는 해석방식은 당신에게도 그럴 듯하지 않나요?

아니요. 그런 견해는 제게는 전혀 호감을 주지 않습니다. 저는 말할 것도 없이 반대의 해석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 견해로는 사람들이 외부로 향한 준거(객관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세상의 죄악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심적 부담(고통)도 사라지고 밖으로 밀려 납니다. 객관주의자들은 심적 부담을 밀어냅니다. 반면 객관적이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관여합니다. 그는 '내가 세상 속에 이 모든 죄악이 있다고 그렇게 본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문장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순간적으로나마 공감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관여함이 성립되며 당신이 걱정한 것처럼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무관심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 대담을 시작할 때 제가 묘사한 짧은 연극 한 토막을 상기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어떤 남자가 말합니다. "저기 나무가 서 있군." 그러면 여인이 말합니다. "거기에 나무가 있다는 것을 넌 어떻게 아니?" 남자가 말합니다. "내가 그것을 보니까!" 이에 여인은 살짝 웃으며 말합니다. "아~" 그리고는 막이 내려갑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 태도 중에서 어떤 것을 받아들일 건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그 남자는 외적 준거에 기반합니다. 반면에 그 여인은 나무를 지각하는 일이 그 남자의 관찰에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짧은 연극에서 흔히 말하듯이 객관성과 주관성의 대립이라든지 다양한 인식론적 입장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주의자와 주관주의자와의 논쟁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좀 다른 것인데, 그 남자는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반면에 그 여인은 자신이 기술하는 세상과 자기 자신을 묶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발명품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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