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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할 수 있는 질문이란 항상 올바른 답, 가능한 답을 이미 제시하는 어떤 틀 안에서 결정됩니다. 그런 질문의 결정가능성은 사람들이 당연히 받아들여야하는 특정 게임규칙과 형식을 통해서 보장됩니다. 삼단논법, 문장론(문법), 산술법 등이 그런 형식의 예입니다. 우리는 논리수학적 연결망이라는 틀 속에서 하나으 ㅣ결절점(하나의 문제 혹은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다른 결절점(답 혹은 해법)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2546이라는 숫자가 2로 나누어지는가에 묻는 질문은 즉각 대답 가능합니다. 마지막 숫자가 짝수로 된 수는 2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결정할 수 없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건 고차원적 본질의 존재, 삶의 의미, 세계의 성립, 사후의 생 등을 다루는 물음입니다. 그런 질문은 있을 법한 수많은 답을 갖고 있습니다.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이게 어떻게 결정됩니까? 만약 물리학자에게 답을 구하면 쉽게 알게됩니다. 모두가 알듯이 백억 혹은 이백억년 전에 빅뱅(근원적 충돌)이 있었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우주가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충돌의 여음으로 여겨지는 미세한 소음을 거대한 초음파 안테나를 통해서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신앙이 깊은 카톨릭 신자에게 묻는다면 천지 창조의 매일 매일을 기술하는 자세한 창조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만약 인도의 힌두교도에게 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그는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어린애들도 알듯이, 한때 거북이 한마리가 있었는데 다른 거북이가 그 위에 올라앉았고 또 그 위에 다른 거북이가 올라갔는데 맨 위 거북이 위에 우주 속 우리가 앉아있다"라고 말이죠. 이 사람 저 사람, 투르크메너족에게, 에스키모에게 질문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서 어떻게 우주가 생겨났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옳은지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은 결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답은 답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뭔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요약하자면,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 제가 뭔가를 말하면 저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누가 저에게 거북이에 대해서 얘기하면 저는 '아! 저 사람은 힌두교도이구나'를 압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빅뱅에 대해서 얘기하면 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압니다. 아하! 넌 물리학자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발명품 252)
2.
수덕사의 회암 스님께 어느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큰스님, 극락이 있습니까?"
그러자 큰스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더니 답하셨어요.
"사립문 밖 한길이 장안을 향했도다."
극락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본 데에는 죽어서 좋은 데 가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사립문 밖, 자기 집에서 대문을 열고 바로 나가면 한 길이 있는데 그 길이 장안, 다시 말해 서울로 통한다고 했어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큰스님의 답변은 극락이 있니 없니 어떻게 가느니 하는 논의가 필요 없다는 뜻이겠지요. 바로 지그 여기서 내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굳이 서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이것을 선에서는 조고각하, '지금 네 발밑을 보라'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 119)
T.
결정할 수 없는 문제를 두고 논쟁을 해봐야 결정할 수 없기에 결론이 안난다. 그러니 관심을 그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으로 돌리고, 사안에 적절한 방안을 모색하는 지혜로 나아간다.
맞다 틀리다는 가치가 아니라 가치의 가치, 즉 누구의 가치인가에 촛점을 맞추면 누구에 대한 앎이 생기고 논쟁과 별도로 적절한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겠다.
"그런데 누가 옳은지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은 결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답은 답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뭔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저에게는 누가 결국에 옳으냐 하는 끔찍한 질문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편협함(불관용)과 싸움만이 지배하는 그런 논의에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다른 생각(사고)을 논박하고 싶어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물어뜯고는 결국에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마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다른 관점을 변호하고 싶고, 우리가 로렌츠의 문장들을 뒤집을 수 있고, 말해진 모든 것을 거꾸로 세울 수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자 합니다.(발명퓸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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