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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완전과 불완전은 실제로 사유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동일한 종(種) 또는 유(類)에 속하는 개체를 서로 비교함으로써 보통으로 지어내는 개념일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앞에서 (제2부 정의 6) 실제성과 완전성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하였다.

- 스피노자, <에티카> 제 4부 서론에서

 

2.

색즉시공色卽是空

- <반야심경>

 

3.  뭇 생명 모두가 그 모습 그대로 부처

 

분별된 모습들을 만들지만 그 모습에 머물지 않고, 머묾 없이 흐르지만 끊임없이 분별상을 만들면서 앎과 기억으로 작용하는 것, 이것이 마음이 된 인연의 작용이며 인연이 마음이 되어 나타나 실상입니다. 더구나 분별된 모습마다 그 모습 그대로 인연의 총상이 되고 인연 그 자체가 되니, 분별된 모습이 시공간의 한편을 차지하여 다름만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분별된 모습에서 보면 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인연의 총상이 분별로써 마음을 나타낸다는 데서 보면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는 뭇 생명 모두가 그 모습 그대로 총상으로서의 인연을 사는 부처의 모습입니다.

인연으로 한 모습이면서 온갖 다름으로 인연을 드러내니, 같은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습니다. 모습을 드러내면서 빈 모습이 되고, 빈 모습이 인연 따라 모습을 드러내므로 모습(相)도 빈 모습(空相)도 자체만으로의 모습(自相)이 없습니다. 이것이 뭇 생명들의 실상입니다. 인연에 수순하는 생명의 흐름이 온갖 인연을 다 담아 찰나마다 다른 모습을 드러내 머물지 않는 생명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부처가 되어야 중생이 아닌 듯하지만, 애초부터 중생과 부처라고 할 것이 따로 없으니, 중생 그대로가 부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라는 특별한 모습으로 변해야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뭇 생명(衆生) 모두가 우주 법계의 역사를 담아 지금의 모습으로 생명 활동을 하기에 하나의 생명이면서 여러(衆) 생애(生)의 생명이 되기 때문이며, 인연으로 어울린 생명관계에 의해서 하나의 생명도 그 모습 그대로 뭇(衆) 생명(生)이 되기 때문입니다. 곧 생명마다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도 시방 삼세의 모든 생명을 담아 자신이 되는 것이니, 생명은 원래부터 그 모습 그대로 특별합니다. 특별한 존재 가치를 구현해야 자신이 생명으로서 존재 이유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존재 이유야말로 만들어진 이미지로 자신을 얽어매는 허상이 되고 뭇 생명을 묶는 끈이 됩니다.

그 모습 그대로가 존재 이유이므로 더 이상 다른 존재 이유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만들어 그것으로 삶을 재는 척도로 삼는 것은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로 만들 뿐만 아니라 이웃조차 부족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니, 만들어진 이미지야말로 생명 현상을 왜곡하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도 머묾 없이 법계의 인연과 함께하는 마음은 어떤 이미지에도 머물지 않기에, 만들어진 이미지는 생명활동의 역사만큼 생명의 흐름과 동떨어집니다. 분별을 만들지만 분별된 모습에 머물지 않는 것이 생명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 정화스님, <육조단경>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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