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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의 <육조단경>

이름 vs 삶

T1000.0 2013. 5. 27. 18:16

분별은 앎과 기억에 의해서 형성되고, 형성된 기억은 다음 분별을 기억에 맞게 재구성하는 바탕이 됩니다. 재구성의 바탕이 된 기억, 곧 분별하여 기억으로 남게 되는 일반상은 이름을 갖습니다. 이름을 지어 부르면서 이름에 맞는 이미지를 상속시켜 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서 이름만으로의 이미지에 머물게 되고, 머물게 된 인상印象은 그 밖의 인연 관계를 배제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름이란 타자를 배제하는 것을 속성으로 삼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타자가 배제된 이름만으로의 자기 이미지를 갖게 되면서, 인연이 만들고 있는 분별과 분별을 통해 나타나는 분별없는 앎이 분별만으로 존재하는 분별상이 되고 맙니다.(정화스님, <육조단경> p231)

 

T1000.0 : 마뚜라나의 책 <있음에서 함으로>에선 세계는 언어 속으로 출현한다고 밝힌다.(관련글 본 블로그 <언어의 출현:행위의 조정의 조정>참조) 마뚜라나는 언어의 출현을 행위의 조정의 조정이라고 하는데 이와 연결지어 정리하자면 분별은 앎과 기억에 의해 형성되고, 다음 분별이 재구성하여 기억하고 재구성된 기억이 이름을 갖게 될때 이 이름이 곧 언어의 출현이다. 이름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출현한다.[有名萬物之母 -도덕경]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계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세계는 언어 속에서 출현하나 언어 밖에 존재가 있는 것처럼 분별하기에 존재는 언어를 벗어나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언어를 벗어나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언어 속에서언어 너머를 보는 방식에 눈 떠야하는데, 이는 언어 밖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언어 밖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무의미한 주장이다. 그것은 증명불가능하다. 언어 밖에 존재하는 것이란 게 언어를 통해 이야기되므로 성립이 되지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넌센스'인 것이다. 반면에 삶은 어떤가?

 

삶의 순간들은 무상한 변화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무상이란 두찰나를 이어 동일한 모습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순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찰나마다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삶입니다. 삶은 연속되지 않는 단 한 순간의 삶입니다. 사는 주체가 삶의 변화를 타고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상한 한 순간이 삶의 전 존재를 드러내는 한 순간입니다. 또한 순간마다의 다름이 앎이 되므로 앎만이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며, 순간이 존재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므로 시간을 이어가면서 완성되어가는 삶도 없습니다. 앎의 한 순간들이 그 자체로 온전한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와 앎 또한 인연의 순간들이 만들어 내는 것과 같으므로 삶을 관통하면서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변하거나 아는 것일 수도 없습니다. 

삶은 찰나마다 온전히 다르면서 앎으로 전존재성을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연의 변화가 만들어 낸 앎이면서 앎으로 인연을 다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앎이 되고, 앎이 되어야 인연이 이루어지기에, 앎과 변화가 삶을 관통하는 근본이 됩니다. 삶을 순간마다 다르게 드러내게 하는 동력인 무상한 인연은 마치 변하려는 의지와 같으니, 변하지 않는 것을 취해 삶을 보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안다는 사실만 놓고 본다면 앎이 마치 변화 밖에서 변화를 아는 것과 같으므로, 움직이지 않는 앎의 속성과 계합하는 일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것을 진실로 여기고, 그 진실을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보는 것이 온 존재로 보는 것이어야 하며, 보는 행위 자체가 진실이어야만 합니다. 무엇이 변화를 알아차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보는 한 순간이 삶의 전부입니다. 봄이 진실함녀 삶이 그대로 진실한 삶이 되고, 봄이 진실하지 않으면 진실하지 않는 삶이 됩니다. 찰나의 한순간이 삶의 전부이기에 오고 감도 없고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삶의 본바탕이 그렇습니다. 앎으로 드러난 순간의 모습을 떠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므로, 움직임으로 드러난 그 순간이 움직이지 않는 한 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p239)

 변화와 앎은 인연의 흐름에 따르면서 인연이 된 삶이 표현해 내고 있는 분별입니다. 분별이지만 변하고 변하면서 앎이 된 분별이니, 인연마다 깨어있는 분별입니다. 이와 같은 분별은 머묾 없는 인연이 만든 앎이므로, 잠시도 움직이지 않는 적이 없지만, 분별을 취해 손안에 쥐지는 않습니다. 변화와 앎은 순간의 인연에 온전히 깨어 있으므로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p240)  

 

T1000.0 : 삶을 포착하는 변화와 앎이 있고 변화와 앎이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변하지 않는 것이 이름이자 언어이다. 언어 속에서 언어 너머를 보는 방식이란, 언어가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앎이다. 이는 공즉시색, 색즉시공과 같은데 '움직임으로 드러난 그 순간이 움직이지 않는 한 순간이 될 수 밖에 없으므로' 색이 곧 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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