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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하는 바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말하는 기본적인 대전제(상위명제)가 살아 있는 사람들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의 명제로서 두 번째 명제가 그와 연관되고 그 규칙을 따를 때 어쩔 수 없이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불쌍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초래하는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결론이라는 것은 짜인 규칙성을 불러 오는 것에 지나지 않고 그 규칙성이라는 것도 세상의 사실적 관계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설명이 행해질 때 따르는 그런 논리적인 연역이 절대적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런 확실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전제를 이미 진리로 받아 들여야 하는데 미리 확정된 결과가 있는 문법적 놀이를 한다고 할 수 있지요. 저는 그와는 반대로 항상 이미 전제된 것들을 되묻기를 제안하는 겁니다.


인과적 설명의 (당신 표현을 빌자면) 구성된 신뢰성을 따르지 않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런 삶은 매우 재미있고 반전이 많은 삶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매 순간 사고하는 방식과 방법을 결정하는 풍요로운 삶입니다. 어떤 전제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함께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우리는 모두 죽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우렁찬 목소리로 분명히 말할 수도 있고 혹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아직 살아 있는) 우리의 인생을 축하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전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특별하고도 다른 어떤 세계를 위한 하나의 결정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를 생겨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면 단선적인 인과 표상에 기반하지 않은 어떠한 사고방식이 전면에 부각될 수 있을까요?

우화, 풍자, 유추, 이야기 등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은 암덩어리와 같이 도처에 잠입한 인과론적 사유에 의해 유감스럽게도 추방된 설명원리들입니다. 예수도 자신의 말에 강조와 권위를 부여함에 있어서 인과성에 대해서 말한 적 없습니다. 그는 시각적인 표현들로 말했고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는 낙타와 부자들 간의 어떤 인과적 관계도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츄와 우화 그리고 이야기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이해했습니다. 문제는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형식과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인과론적 사유의 사회적 주입력 및 권력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원인과 결과의 결합을 무조건적으로 믿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들에 대한 끔찍하게도 단순한 표상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 분석가능하지도 않고 따라서 모든 것이 인과론적 사유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놀라움, 기적, 경이롭게 보이는 사건은 늘 있습니다. (발명품 84)

 

T.

인과론적 사유의 권력은, [무지를 메우는] 원인을 이미 전제하고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인의 환상을 부여한다.

*들뢰즈가 주목하는 스피노자의 '의식에 대한 고발'은 인과론적 사유의 권력에 대한 고발을 함축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스피노자주의를 스캔들의 대상으로 만들었던 실천적 논제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실천적 논제들은 다음과 같은 삼중의 고발을 함축하고 있다. <의식>에 대한 고발, <가치들>에 대한 고발, <슬픈 정념들>에 대한 고발.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사람들이 그를 유물론, 비도덕주의, 무신론으로 비난했던 이유들이다.(스피노자의 철학 31)

 

**또하나 우리가 '무아'를 사유하지 못하는 장벽에는 인과론적 사유의 권력이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인과론적 사유는 나라는 주체를 원인으로서 이미 전제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전제를 도무지 의심하지 못한다. 

 

*** 나의 과제 : 인과론적 사유의 권력을 고발하는 '놀이'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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