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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이 조건 그대로

 

성추행을 당했던 마음의 상처 때문에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려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방안에만 웅크리고 있는 아가씨가 있습니다. 성추행으로 자기 몸에 더러워졌다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남자가 만지면 몸이 더러워진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어떻게 만지면 몸이 더러워집니까? 팔을 만지는 건 그래도 괜찮고 가슴을 만지면 더러워집니까? 얼마나 오래 만지면 더러워집니까? 5초쯤은 상관없지만 그 이상 만지면 더러워집니까?

남자가 내 몸에 손을 대는 순간 일어난 순간은, 내가 내 몸이 더럽혀졌다는 한 생각을 일으켰다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더러워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더러워졌다는 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 오랜 시간을 꿈속에서 살았구나!' 그렇게 탁 깨달으면 이제까지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더렵혀졌다는 그 생각이 망상이고 꿈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추행한 남자가 죄가 없다거나, 그에게 죗값을 묻지 말아야 한다거나, 그를 처벌하는 일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법대로 엄중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사회적인 처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괴로움을 여의어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그의 악행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내 몸은 점점 더 더럽혀집니다. 그의 행동이 악행인 이유가 내 몸을 더렵혔기 때문이니까요. 더구나 그에게 어떤 극형의 고통을 줄지라도 내 몸이 깨끗하게 회복되거나 내 인생을 돌려받을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인간이 뻔뻔스럽게 잘도 살아 있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더욱 더 큰 고통이 됩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인생이 하느님이 내게 주신 벌이거나 전생에 내가 지은 죄의 대가라면, 그 엄청난 죄업을 녹이기 위해 얼마나 많이 보시를 하고 얼마나 오랜 시간 선행을 해야 하겠습니까. 어쩌면 세세생생 되풀이해서 애써도 그 죄를 깨끗이 하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역시 좌절과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금강경 한 구절을 읽고 제법이 다 공함에 눈을 뜨면 그 즉시 내 삶은 달라집니다. 일체가 다 공하므로 몸은 그대로 몸일 뿐이지 본래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더럽힐 수 없고 누구도 깨끗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는 참모습을 보는 거기에 청정함이 있으니, 이 몸의 실상은 한순간도 청정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어젯밤 꿈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더라도 한순간 눈을 번쩍 떠서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면 고통은 사라집니다. 모두 꿈이었으니 괴로워할 일이란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모든 상이 공함을 알면 그만입니다.

전생의 업이라는 자책도, 사주팔자를 한탄하는 것도, 하늘의 벌을 받는다는 부끄러움도 다 꿈속에서 일으킨 망념에 불과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악몽을 악몽으로 끝내버린 사람은 맑은 정신으로 밝은 햇빛을 받으며 푸른 나무 그늘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꿈속 일에 매달려 벗어나지 못한다면 밝은 태양빛도 세상을 밝히지 못하고 아름다운 숲길도 지옥일 뿐입니다.

제법이 공함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한없이 무거웠던 등짐도 눈을 뜬 뒤에는 조금도 나를 힘들게 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 짐은 본래 짐이 아니었음을 보게 됩니다. 학벌이 낮다, 병이 들었다, 이혼을 했다, 자식이 없다, 아기를 못 낳는다, 사업에 실패했다, 실직을 했다, 어떤 일도 다 그렇습니다. 눈곱만큼도 나를 괴롭힐 수 없고, 눈곱만큼도 나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상을 가진 모든 것이 다 허망한 줄을 깨치면, 나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순결무구한 보살이고 부처입니다. 때 묻은 더러움과 때 묻지 않은 깨끗함, 깨달은 부처와 어리석은 중생이 둘이 아닌 이치가 그것입니다.

아무것도 내 삶에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내 삶에 흠집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내 모습과 처지와 조건을 바꾸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 모습 이 조건 그대로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각주:1]

 

T1000.0 : 이미 완전한데 단지 모를 뿐.

 

 

  1. 법륜스님, <금강경 강의> p40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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