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혜는 따로 필요하지 않다.
최초의 지혜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볼 때만이 대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비로소 대상에 대한 지식이 생기고 지식을 활용하는 지혜가 생기고...한다.
지혜는 따로 필요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될 뿐이다.
반야심경도 이와 똑같이 말한다.
"無智亦無得"
있는 그대로 보는 데 지혜가 따로 필요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따로 얻을 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 보면 그뿐이다.
다만 그렇게 할 뿐이다.
다만 할 뿐이다.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거든 지혜를 구할 게 아니라 버려야 한다.
나에게 형성되어진 편견, 무의식, 업식을 내려놓아야 비로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를 보기위해 버린다는 것은 나의 생각을 해체하고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물이나 속성이나 어떤 대상도 공(空)함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해체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이지 대상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공이다.
예컨대 욕망을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할 때 해체해야할 것은 욕망이 아니다.
해체해야할 대상은 욕망을 바라보는 내안의 편견이다.
[우리는 욕망을 해체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욕망을 털끝만큼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욕망이 보이지 않는 속성이기 때문에 그런가? 아니다.
어떤 대상도 보이든 보이지 않든 자기의 속성을 표현한다. 우리는 그것을 본다.]
또한 주체와 대상도 둘이 아니다. 주체도 나고 대상도 나인 것을 깨닫는다.
다시말해서 해체하는 주체도 나고, 해체할 대상도 나다.
그렇다면 "욕망은?"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우리는 욕망을 털끝만큼이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가능한 것은 다만 있는 그대로를 볼 뿐이다. 다만 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도록 자기를 비우는 것[강렬도=0]이 먼저 할 일이고
두번째로, 있는 그대로 보는 신체 위로 그것이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요컨대 욕망을 예로 들었으니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보는 신체 위로 그 욕망이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는 자신을 만들어라.
이것은 "기관 없는 신체"다.
자기를 비운, 강렬도=0인, 기관 없는 신체.
그렇다, 다만 이렇게 할 뿐이다, "기관없는 신체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
*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노력은 경청과 공부[연구]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태도는 긍정과 존중[인정과 이해]을 꼽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천의 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의 고원>의 시작: 무실무허 (0) | 2012.12.26 |
---|---|
쾌락 vs 기쁨 (0) | 2012.09.14 |
기관없는 신체와 불교 (0) | 2012.09.08 |
다만 할 뿐 (0) | 2012.09.06 |
[중도 혹은] 기관 없는 신체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0) | 2012.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