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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눈으로 보면 기관없는 신체는 중도(中道)이며, 내재성의 장 혹은 일관성의 구도는 공(空)이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증거로 이해할 수 있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 높여준다.[양경쌍조] 또한 이렇게 생각되기도 한다. 중도와 공의 사상이 확장된. 기관없는 신체와 내재성의 장은 대승의 대승 혹은 대승의 바깥으로 여겨진다. 한 개인 또는 대중들 뿐 아니라 사회, 국가, 시스템의 해탈을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을 보면 나는 기관없는 신체를 먼저 만났다. 처음 그것은 이해가 되지않았지만 마술같은 매력에 이끌려 늘 나를 따라다니는 화두가 되었다. 화두를 쫒다가 중도와 공을 만나게 됐고, 그리고 중도와 공이 기관없는 신체를 이해할 수 있는 신체로 만든 것 같다. 위대한 개념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 같다. 운동처럼 어려운 기술을 구사하려면 그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신체가 되어야하는 것처럼, 정신의 문제에서도 똑같은 것 같다. 운동선수처럼 정신을 연마해야, 능력있는 신체를 만들어야 비로소 개념들이 들어온다. 나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야할 신체가 '기관없는 신체'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누구나 '기관없는 신체'가 될 때만이 새로운 존재로 피어난다. 나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신체'라고 말하는데,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망각하지 않으면 몰락하지 않으면 새롭게 태어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관없는 신체는 강렬도가 0인 신체이며, 있는 그대로 보는 신체는 자기를 비운, 무아(無我)의 신체이다. <천의 고원>의 철학은 불교의 문턱을 넘어 새 옷으로 갈아입고 진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점이 나를 끌리게 하는 마술력 매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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