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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히스트의 고통은, 쾌락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과 그 외재적 척도인 쾌락을 잇는 사이비 결속을 해체하기 위해 그가 치러야만 하는 대가다. 쾌락은 오직 고통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서만 얻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쾌락은 가능한 한 지연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긍정적 욕망의 지속적 과정을 중지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욕망이 그것 자체와 그것의 명상으로 채워져 있듯이, 욕망에 내재하는 기쁨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결여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쾌락에 의해서 측정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쾌락의 강렬도들을 분배하고 그것들이 공포, 수치, 죄책감으로 뒤덮이는 것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조히스트는 기관없는 신체를 구성하고 욕망의 일관성의 구도를 해방하는 수단으로서 고통을 이용한다. 다른 수단이 있다는 것, 마조히즘과는 다른 절차들, 확실히 더 나은 것들이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절차가 어떤 이들에게는 적합하다는 것이면 충분하다.[각주:1]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을 기쁨, 슬픔, 욕망 이렇게 3가지만을 인정했다. 또한 욕망은 욕구와 같은 것인데 욕구를 의식하는 것이 욕망이라고 했다. 따라서 욕구가 기쁨이나 슬픔으로 이어지는 지를, 즉 그 결과를 의식함으로서[의식은 결과이므로[각주:2]] 즉 욕구를 욕망으로 의식하는 관조 속에서 당연히 욕망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내재한다. 즉 욕망은 쾌락이 아니라 기쁨을 욕망한다. 반대로 쾌락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다. 쾌락은 슬픔을 멋지게 포장한 슬픔에 다름아니다. 공포, 수치, 죄책감은 쾌락을 댓가로 감당해야 될 슬픔의 정념들이니 말이다. 따라서 욕망이[욕망의 내재적 과정이] 기쁨으로 흐르도록, 기관없는 신체를 이루도록, 일관성의 구도로 회복되도록 마조히스트는 고통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한편 저자들이 다른 절차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선사들이 깨달음의 신체가 되기 위해 화두를 이용하는 것이 그와 유사해 보인다. 화두를 통해 깨달음의 신체가 되기 위한 욕망은 처절하다. 며칠밤을 잠도 자지않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화두를 붙잡고 용맹정진하는 스님들. 마땅히 스님들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의 기쁨이란 쾌락으로 측정될 바가 아니다. 왜냐면, 이미 그들은 오로지 그 기쁨을 이루기 위해 모든 속세의 인연을 끊은 지독한 수도자이기 때문이다. 한량없는 기쁨, 기관없는 신체. 어떻게 기관없는 신체를 이룰 것인가?

 

 

 

 

 

 

 

 

  1. <천의 고원> '어떻게 기관없는 신체를 이룰 것인가?' p163. 연구공간 '너머'자료실 [본문으로]
  2. 의식의 본성은, 결과들을 받아들이되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p3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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