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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은 차이들을 존중할 것이고, 자신들이 진리의 유일한 소유자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즐길 것입니다. 그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차이나는 문화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2.
내가 볼 때 핵심 문제는 기대하지 못한 어떤 것이 드러났을 때 우리가 우리의 확실성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망스러운 체험들이 꼭 깊은 좌절과 분노로 연결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체험들이 정말 극적으로 새로운 전망들을 열어젖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들이 충족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너무 흥분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잡기로 결정하는 거죠. (함으로 69)
3.
인과적 설명의 (당신 표현을 빌자면) 구성된 신뢰성을 따르지 않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그런 삶은 매우 재미있고 반전이 많은 삶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매 순간 사고하는 방식과 방법을 결정하는 풍요로운 삶입니다.[불수자성 수연성] 어떤 전제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함께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우리는 모두 죽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우렁찬 목소리로 분명히 말할 수도 있고 혹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아직 살아 있는) 우리의 인생을 축하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전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특별하고도 다른 어떤 세계를 위한 하나의 결정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를 생겨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발명품 84)
4.
다른 사람은 내가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는 정당한 타자가 됩니다. 우정, 상호존중, 그리고 협력이 나타납니다.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일원우주는 다원우주로 바뀝니다. 이 다원 우주 안에서는 무수한 실재들이 타당성의 다양한 기준에 준거해 타당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스스로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5.
저도 모르지요. 그저 다른 말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실재라고 생각하는) 놀이를 같이 하도록 다른 사람을 초대하려는 시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바람은 내 말을 (나의 언어를) 잘 구사해서 정치가 됐건, 과학, 시 혹은 무엇이 됐건 모든 대화 속에 나의 윤리가 내재되도록 하는 것, 그래서 내가 어떤 문장을 말하더라도 늘 점잖은 사람으로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려 하지 않는 사람, 자신을 재판관이나 경찰과 같은 지위로 끌어 올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각자의 여지를 부여하는 그런 점잖은 사람 말입니다. 이게 제가 궁긍적으로 올바른 언어와 설명형식을 말하기 위한 어떠한 범주도 어떠한 목록표도 언급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6.
어떤 사람의 진정한 지혜는 영속적인 자기고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찰의 역량에, (특정한 상황들을 정확하게 지각해내는 것을 방해하는) 이러저러한 신념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자발성에 있다는 것이 내 견해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을 관찰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지시하고 있는 궁극적 진리에 인도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7.
나는 결코 누구도 확신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 생각들을 접하고는 골치 아파 합니다.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나는 결코 그들의 견해들을 교정해서 내 자신의 생각을 그들에게 강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사람들은 지난 20여년 동안 내가 출간한 것들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것들이 그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가 쓴 것을 단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강의를 들으러 오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나의 성찰들을 따르고자 하는 초대입니다. 내가 해야할 유일한 일은 나와 대화하려 하고 대화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나는 논문과 책들을 쓰고 학생들과 작업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어쩌면 한 젊은이가 독일에서 칠레로 건너와 나를 방문해서는 더 꼼꼼하게 세부적인 것들에 해대 물을지도 모르지요.
8.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일 수 있을까요? 자유의 황홀한 이점들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슬에 묶어야만 할까요? 폭력을 거부하라고 우리가 사람들을 강제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접근법은 결코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내 견해는 이렇습니다. 소위 윤리적 법률과 규범들조차도 성찰의 가능성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의 토대들을 제거하고 복종을 요구합니다.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폭정을 위한 또 하나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어떤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이 선택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믿음과 행위들에 내재해 있는 결과들을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도록 강제하거나, 사물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다소 폭력적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9.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깨달음에서의 변화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식으로건 강제에 의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개인의 통찰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비록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단순한 생각이 불가피하게 폭정의 유혹에 직면케 한다 할지라도 내가 분명 다른 종류의 세계를 원할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나는 서로를 존중하는 협력적 개인들이 구성하는 민주적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계를 갈망합니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더불어 살기'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압력과 폭력 없이 실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민주주의를 살아 있도록 유지하기 위해 민주적으로 고무된 개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여행이 곧 목적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용 가능한 수단은 내가 도달하고자 원하는 목적의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누구에게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입니다.
10.
미적인 유혹과 관련해서 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일은 그저,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과 내가 하고 있는 것 사이의 어떠한 불일치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득하고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생산하고 명확하게 하는 체험들을 낳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와 알고 지내게 되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 앞에서 보게 되는 것을 그들이 받아들이길 원하는지를 스스로 혼자 힘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오직 말해지는 것과 행해지는 것 사이의 불일치가 없을 때에만, 핑계도 없고 압력도 없을 때에만, 미적인 유혹은 펼쳐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 기울여 듣고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제약받지 않고 기분 좋은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만큼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들은 공격받지 않으며, 어떤 것에 하도록 강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도 그 자신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무방비 상태로 내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언제나 바람직하게 유혹적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질문들과 두려움들이 갑자기 정당하게 되고, 서로 마주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들이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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