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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식의 행위를 인식하는 자와 뗄 수 없이 엮어 버리는 그러한 급진적 사고는 다양한 학문적, 종교적, 나아가 일상적 인식행위의 중심에 놓여 있는 개념인 진리개념을 불신하게 만드는군요.
원래 진리개념은 관찰과 독립적인 세계를 전제할 때 이해되는 것이거든요. 진리란 (사태를) 인식하는 정신과 사태 자체의 일치로 파악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이 같은 견해에 관한 한 철학자들은 진리개념에 대한 상응이론적 규정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때 표상과 세계가 근거가 되고 그 둘은 정확한 상응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개념의 면면들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이러한 정의로부터 출발하는 게 의미가 있을 겁니다.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게는 정의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상응이론적 관점에서 정의를 하건 정합론적 관점에 됐건 뭐가 됐건 진짜 제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게 되면 진리라는 개념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늘 다른 색깔을 띠게 되는 철학사적 카멜레온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그 단어는 얼룩무늬를, 칸트에게는 선을, 쇼펜하우에에게는 점박이 무늬를 띄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어떤 상당히 어려운 정의를 갖고 출발하는 것은 대화의 진전을 위해서 좋은 출발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제 목표는 오히려 진리개념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개념의 사용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 개념은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을 옳은 사람과 옳지 않은 사람으로 갈라놓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진리란 거짓말쟁이의 발명품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발명품 43)
T. 불립문자의 중요성.
2.
제8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내지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러주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라. (금강경)
옳고 그름 역시 그렇습니다. 다만 인연 따라 그때그때 상황속에서 잠시 형상을 갖추고 나타나는 것이지, 옳다 그르다 할 본래의 성품이 없습니다. 불법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이것이 불법이다'라고 절대화시킨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법륜, 금강경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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