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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가타리<천의 고원>

1장. 책

T1000.0 2012. 12. 27. 10:47

한 권의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하게 형식화된 질료와 그리고 매우 상이한 날짜, 속도들로 만들어진다. 그 책에 하나의 주체를 부여하는 순간, 우리는 질료의 가공과 그것의 관계가 갖는 외재성[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그것은 지질학적인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선량한 신을 만들어 내는 것과도 같다. 모든 사물들에서 그렇듯이 한 권의 책에도 분절의 선들, 혹은 선분성의, 지층의, 영토성의 선들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탈주의 선들, 탈영토화 운동의 선들 그리고 탈지층화의 선들이 존재한다. 이 선들이 따르는 흐름의 상대속도는 상대적인 지연, 점성[엉겨붙는]의 현상을, 아니면 이와 반대로 급속함과 단절의 현상을 야기한다. 이 모든 것들, 선들과 측정가능한 속도들은 하나의 배치를 구성한다. 한 권의 책은 그처럼 하나의 배치인 것이고, 그것은 그런만큼 [어떤 대상이나 주체로] 귀속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다.[각주:1]

 

T1000.0 : <천의 고원>은 책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자들은 책은 주체도 대상도 갖지 않는 하나의 다양체라고 한다. 다양체라고 함은 책이 외부와 만나 새로운 작용[쓰임]으로 다양하게 변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예컨대 펀드매니져가 <주역>을 읽고, 즉 <주역>과 접속해 <주역>이 주식투자의 교본으로 변용될 수 있다). 또한 책은 배치라고 했는데, 내 생각에 배치는 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인연이다. 책은 인연의 소산이고 인연의 배치다. 인과 연의 만남이 이미 배치를 말하고 있듯이 책이 보여주는 선들, 지층들 등등의 배치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배치는 이것과 저것이 만나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지는, 배치가 바뀌면 사라지고 배치가 바뀌면 생기는 연기緣氣적 사유이다. 흥미로운 점은 책을 몸으로 바꿔 읽어도 틀림이 없다.  한 사람의 몸은 "그처럼 하나의 배치인 것이고, 그것은 그런만큼 [어떤 대상이나 주체로] 귀속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다"

아래 인용하는 글은 '죽비'가 다양체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죽비에게 죽비라는 "하나의 주체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이 관계하고 있는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즉 다양체임을 무시하게 된다.

 

여기에 죽비가 하나 있습니다. 죽비는 참선을 할 때 소리를 내 시작과 끝을 알리는 데 쓰는 도구입니다. 그것이 '죽비'라는 물건의 사용처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비가 뭐하는 물건인지 몰라 지팡이로 사용했다면 그때는 그것이 지팡이입니다. 등을 긁는 데 썼다면 그때는 등긁기입니다.

그런데 등 긁는 용도로 사용하는 걸 보면서도 그것이 등긁이가 아니라 죽비라고 고집하면 그것을 법집이라고 합니다. 또 반대로 그것이 죽비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이건 지팡이다. 등긁이다 고집한다면 그것은 아집입니다.

죽비가 네 동강 난 채로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걸 죽비를 아는 사람이 본다면 죽비가 부러져 있다고 말하겠지만, 죽비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이 그저 부서진 나뭇조각일 뿐입니다.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 참선할 때 쓰면 죽비고, 아궁이에 넣으면 땔감이고, 등을 긁으면 등긁이고, 두들겨 패는 데 쓰면 몽둥이입니다.

'이것이 죽비다' 하는 법은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일으킨 생각을 하나로 묶어서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 자체는 죽비도 몽둥이도 땔감도 아니고 여여한 하나의 존재일 뿐입니다. 거기에 실다움도 헛됨도 없습니다. 세상 무엇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무아입니다.[각주:2]

 

 

  1.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 <천의 고원> p8 [본문으로]
  2. 법륜스님, <금강경 강의> p3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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