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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적인 언표는 없다. 단지 언표를 생산하는 기계적 배치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 자체론 무의식이다. 우선 우리는 그 배치가 근본적으로 리비도적이고 무의식적이라고 말한다. 우선 우리는 배치들이 몇몇 종류의 요소들(혹은 복수성들)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할 것이다. 몰적으로 조직된 인간적, 사회적, 기술적 기계들; 비인간-되기의 입자들을 가진 분자적 기계들; 오이디푸스적 장치들(물론 오이디푸스적 언표들이 있어서, 너무 많이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가변적인 양상과 기능을 갖는 반-오이디푸스적 장치들. 우리는 이후 그것을 검토할 것이다. 우리들은 구별되는 기계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다만 상호 관통하면서 주어진 계기에 단일한 기계적 배치를 형성하는 복수성의 유형들에 대해서만, 즉 리비도의 얼굴없는 형상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우리들 각각은 그같은 배치 안에 사로잡혀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 그 배치의 언표를 재생산한다; 혹은 오히려 우리가 그것의 언표를 생산할 때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얼마나 기괴한 언표들이며, 진정한 광인의 말인가.[각주:1]

 

T1000.0 : 나는 무엇인가? 불교에선 나는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즉 색수상행식, 다섯가지 작용의 쌓임. 따라서 본래 나라는 실체 또는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쌓인 인연이 있을 뿐이다. 내가 말하는 것, 말들이란 오온의 기계적 배치에서 생산되는 언표들이지 개별적인 언표란 없다. 물론 기계적 배치가 근본적으로 무의식적이란 것이 중요하다. 무의식적이란 것은 그 배치가 어떤 질서로 형성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들은 구별되는 기계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그 유형과 결과[얼굴없는 형상]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를 고유의 '실체'로 느끼게 하는 이름이란 무엇인가?

 

개별적인 언표는 없으며, 그런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언표는 어떤 기계적 배치의 생산물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언표행위의 집합적 대행자의 생산물이다(여기서 '집합적 대행자'라는 말은 사람들이나 사회들이 아니라 복수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유한 이름은 개인을 지시하지 않는다. 탈인격화를 좀더 엄겪히 실행한 결과 복수성이 개인을 이리저리 횡단하는 것은, 그리고 진정으로 그에게 고유한 이름을 획득하도록 하는 것은 반대로 개인들이 복수성 속에서 펼쳐지는 때다. 고유한 이름은 복수성의 즉각적 포착이다. 고유한 이름은 강도들의 장에서 그 자체로 포착된 순수한 무한자의 주체다.[각주:2]  

 

T1000.0 : 가령 '나' 다운 것이란 무엇인가? 나 답다는 고유한 이름이 붙여질 때는 '개인들이 복수성 속에서 펼쳐지는 때'다. 하나의 모습에서 이름은 발견되지 않으며, 나 답다 혹은 너 답다를 구분할 수 있는 때는 "고유한 이름의 강도들의 장에서 그 자체로 포착된 순수한 무한자의 주체"로 인식될 때이다.  

 

 

  1.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 <천의 고원1> p43 [본문으로]
  2. 같은 책, p4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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