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며느리 ㆍ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신랑이 늦둥이라 저와 나이차가 50년 넘게 나시는 어머님... 저 시집오고 5 년만에 치매에 걸리셔서 저혼자 4 년간 똥오줌 받아내고, 잘 씻지도 못하고, 딸내미 얼굴도 못보고, 매일 환자식 먹고, 간이침대에 쪼그려 잠들고, 4 년간 남편품에 단 한번도 잠들지 못했고, 힘이 없으셔서 변을 못누실땐 제 손가락으로 파내는 일도 거의 매일이었지만 안힘들다고, 평생 이짓 해도 좋으니 살아만 계시라고 할수 있었던 이유는 정신이 멀쩡하셨던 그 5년간 저에게 베풀어주신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제나이 33살 먹도록 그렇게 선하고 지혜롭고 어진 이를 본적이 없습니다. 알콜중독으로 정신치료를 받고 계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제가 10살때 집나가서 소식없는 엄마.....
1. 그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면 그의 결정을 예측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기 싫다(말하기 싫다/듣기싫다 등등)는 욕망'을 여러가지 핑게로 위장한다. 가령 "가고는 싶은데"라고 말해도 욕망은 '가기 싫다'고 하는 것이어서 그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읽을 수 있으면 말꼬리를 잡을 이유도 없고 불필요한 감정에 휘둘릴 것 없이 앞일을 내다볼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하고 싶은 것을 한다. 2.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설령 우리의 의지에 반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또는 무언가를 하도록 강제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우리가 그 순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행위들이 낳을 결과들을 욕망합니다. 『있음에서 함으로』p281
1. 사람들이 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립니다. (화가의 잔인한 손 66) 1-1 정말로 보는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림을 그립니까?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립니다. 그것 말고 달리 무엇을 위해 그리겠습니까? 보는 사람을 위한 작업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겁니까? 보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상상하는 겁니까? 나는 나 말고는 그 누구도 흥분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내 작품을 좋아해 주면 나는 언제나 놀랍니다. 내가 몰두하는 일을 통해 생활을 할 수 있어서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행운이라면 말입니다. (..
1. 한 생각만 돌이키면 내 인생의 문제는 끝나버립니다. 애초에 빌고 도움을 요청할 일이 없어져요. 그 다음부터는 하는 일마다 한가해집니다. 남 돕는 일밖에 할 일이 없거든요. 남을 도와야 한다는 게 아니라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다 남 돕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제 일에 바빠 남을 데려와 자기 일을 시키지만, 자기 할 일이 없는 사람은 결국 남의 일을 거들어주게 됩니다. (지금 여기깨어있기 254) 2. 자기 할 일이 없어진다는 것[소요유]은,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무아], '나의 것'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무소유]을 통찰한 경지. 나의 모든 행함이 연기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므로 한가히 나와 남을 돕는 것이 된다.
1. 그러니 일이 없어서 한가한 게 아니라 일이 많은 가운데 한가하고, 인연을 다 끊어버려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인연이 있는 가운데 자유로워야 합니다. 연꽃이 진흙탕 속에서 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듯이 우리도 온갖 혼잡한 가운데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연잎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은 연잎이 스스로 매끄럽기 때문이지요. 내가 걸림이 없다면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도 나는 걸릴 게 없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깨어있기 250) 2. 인연의 인으로서 1.스스로 매끄럽기 연으로서 2.매끄러운 공간과 홈 패인 공간에 대한 사유
1. 원효는 이제야말로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천민들이 사는 소와 부곡으로 거침없이 갈 수가 있었어요. 그들을 구제하러 간 것이 아니에요. 중생이라는 것은 본래 없습니다. 시비심을 일으키는 내 마음이 중생심이고 중생심을 일으키는 그 순간 내가 바로 중생이지요. 그들은 중생이 아니고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구제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배우러 가는 것예요. 그래서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기 위해 그곳으로 갔습니다. 예전에는 '그들은 마땅히 구제 받아야 할 중생이고 나는 그들을 구제해야 하는 책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꺼림칙해서 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용기를 내서 그들을 구제하러 내가 그곳으로 간다.' 이렇게 생각해서 간 것이 절에서의 불목하니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구제할 중생이..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어떤 말도 그에게는 잔소리이기에, 그의 모순을 성찰하도록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