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얽매는 것은 앎이 아니라 앎의 앎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앎의 앎을 성찰하는데 있다. 선택의 좋고, 나쁨은 우리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이득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에 달려있다. 다만 이득인지 손해인지는 결정할 수 없다. 그저 선택과 책임이 따를 뿐이다. 항해하는 보트 조정처럼 손해가 나면 조정하고 이익에서 벗어나면 다시 조정하고 다시 조정하므로서 손해도 이익이고 이익도 이익인 결과로 나아간다. 괘도에 역행하는 손해나 항해를 멈추게 하는 손해는 항해를 위해 근절해야할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손해인지 이익인지 결정할 수 없다. 선택과 책임이 있을 뿐이다. 1. 이어서 법륜 스님에게 청법가와 삼배를 올린 후 졸업기념 법문을 청해 들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행자대학원 3년..
모든 상이한 구성원 개인들이 그들의 진술들이 서로 모순된다 할지라도 그와 동시에 옳을 수 있는, 상이한 실재들의 다원 우주. (함으로 233) 나는 민주주의가, 자기존중과 타자들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참여와 협력이 가능할 수 있는 '더불어 살기'의 공간으로서 매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재가 파괴하는 첫 번째의 것은 한 사람 한사람의 개인의 자기 존중과 자율입니다. 독재는 살아 있음의 대가로 복종과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288) 내 저작을 읽은 독자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창조에 불가피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내가 사람들이 강제나 대가 없이 시도해보도록 초대하는 견해 - 개인의 가치를 평가하는 견해 - 입니다. 그리고 진가를..
오늘날 선생님의 생각들이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것이, '종종 상기되는' 모든 이데올로기들의 종언과 실존 사회주의의 붕괴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써 온 것'은 - 독재가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 자기존중의 가능성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제공합니다. 내 저작을 읽은 독자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창조에 불가피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내가 사람들이 강제나 대가 없이 시도해보도록 초대하는 견해 - 개인의 가치를 평가하는 견해 - 입니다. 그리고 진가를 인정받고 존경받는다고 느끼는 사람들[타자들에 대한 존중]은 누구나 그들 자신의 진가를 인정하고 존경할 수 있게 될 것[자기존중]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것'에 대한 책..
1. 칠레에서의 17년의 독재 체제 시절 내내 선생님은 학생들과 함께 대학교수로서 작업했습니다. 선생님은 대학 내에서 어떻게 공개적으로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선생님은 강의를 어떻게 운영했습니까? 내가 '인지생물학'이라는 제목의 연속강의들을 생각해 냈던 때가 아직 1973년이었고, 이 강의가 나중에 가 되었습니다. 나는 매년 이 강의를 했고, 단일 세포에서 사회로 이르는 길을 서술했습니다. 나는 어떠한 직접적인 방식으로도 정부를 공격하거나 어떤 정치적 목적을 위한 공개적인 운동을 하지 않으려고 주의했습니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절대로 내 학생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가도록 재촉하지 않고 성찰을 위한 자신들의 역랑을 한 걸음 한 걸음 발전시키기를 바랐습니다. 만일 내가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
우리가 단지 위선적일 뿐이며 그저 관찰하고 있다는 믿음이 교활하고 세련된 형태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글쎄요. 그건 정말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상황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권력의 유혹물들에 면역되어 있다고 확신할 때 특히 위태롭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유혹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권력을 휘두르는 것의 기쁨, 통제의 통제되지 않은 행사가 주는 유쾌함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도덕이나 그 밖의 다른 것이 관계되는 한 우리가 어쨌거나 특별하다고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견해 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를 고문자들로 만들수도 있는 상황들에 정신적으로 대비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이 면역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들에서는 ..
독재 시절 동안의 선생님만의 바로 그 체험들이 내게는 가장 중요한데, 그것은 그러한 체험들이, 내 생각에는, 선생님을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어떤 운명적인 영웅주의를 옹호하지 않고, 복종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으며, 권력을 다루는데 있어서의 최대한의 깨달음을 주장합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당분간 복종하고 되받아칠 적절한 기회를 기다리지 않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1) 나의 근본적인 요점은 우리의 책임을 선언하는 것이고 2) 타자들이 완전한 깨달음을 가지고 행동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자들에게 권력을 부여할 때 나타나는 세계를 우리는 원하는가? 우리가 우선 살아남기를 원하는가? 권력을 무제한적이고 강경한 방식으로 행사하는 것을 통해 출현하는 세..
선생님은 모든 인간들이 그들만의 인식 및 행위상의 법칙들을 따른다고, 그것들이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생각은 직접적이고 선형적인 통제 개념에 엄밀한 한계들을 설정합니다. 하지만 독재자들이 휘두르는 권력과 폭력은 결국, 사람들이 외적 폭력들에 의해 얼마나 광범위하게 통제되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강력한 사례가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독재 체제 하에서 살아 보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뭘 말하는지 알고 있답니다. 이상할 만도 하지만, 권력은 복종이 있을 때에만 출현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당하는 개인들의 결정들과 구조에 의존하는 복종 행동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함으로써 권력이 독재자들에게 부여됩니다. 우리는 어떤 것 - 생명, 자유, 재산,..
언젠가 어떤 축하 논문집에서 선생님은 그를 체계들을 다루는 기술에서의 선禪의 달인이라고 서술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하인쯔 폰 푀르스테르는 체계들에 대해 대단히 깊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들의 모체를 알고 있고, 이 모체에 의해 덮이지 않는 틈들과 빈 공간들을 발견합니다. 이 틈들 속에서 그는 완전한 자유와 더할 나위 없는 자기믿음을 가지고 움직이며, (꼭 그래야 한다면) 자기 자신을 보이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몇몇 일들이 마무리하기 위해 그와 함께 마을로 내려가서 주차 공간을 찾던 때가 기억나는 군요. 하인쯔 폰 푀르스테르는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바로 아래에 붙어 있는 경찰서 앞에다 차를 주차했습니다. "특별히 허가된 차량만 주차 가능함." 그가 매우 자신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