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지는 대상을 바라볼 때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는 특성을 부풀립니다. 아름다움, 추함은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며, 연기하여 존재하므로 생각에 의존하며, 생각을 부풀리면 탐진치, 해로운 마음을 일으킨다. 본래는 공하여 자성이 없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자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약견제상비상 - 모든 상에서 상 아닌 것을 본다. 상 아닌 것으로 봄으로써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임을 확연히 안다. 얻을 수 없음을 앎으로써 저절로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면서 오고 가는 기쁨을 그저 향유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의 근본적인 확실성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복잡성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초점을 한정하고, 어쨌든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명확한 기대들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확실한 문제에 기대들에 매달리는 것도,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것도, 다양한 현상들을 하나의 개념, 아니 심지어 유일한 개념으로 범주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볼 때 핵심 문제는 기대하지 못한 어떤 것이 드러났을 때 우리가 우리의 확실성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망스러운 체험들이 꼭 깊은 좌절과 분노로 연결되어야만 하는 것..
1. 복종 우리는 실재가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이 권위적이고 보편타당한 진술들을 가질 수 있다는 신념과 부합한다는 것을 잊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어떤 종류의 체험을 불신하게 하는 데 이용될 수 있습니다. 진술을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실재에 준거하는 것입니다. 권력, 지배 그리고 통제에 기초를 둔 문화에서,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그 자신의 견해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해 줍니다. 2. 존중 그렇지만 실재에 다가갈 수 있는 단일한 특권적 접근법이 없으며, 지각과 환각이 체험의 현실적 과정에서는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인간이 '일이 이러이러하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발생합니..
1. '관찰자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 어떤 것을 그것이 마치 자신들과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구분하는 인간들이다.' 그래서 이제 이 체험이 설명되어야만 합니다. 이 방에 있는 탁자와 의자들, 나의 재킷, 내가 두르고 있는 목도리 -- 이 모든 것들은 의심할 바 없이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주어진 상황의 외부에, 그리고 그것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관찰하기가 하나의 체험, 즉 사물들의 외관상의 독립적인 존재와 역시 관계되는 체험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이러한 사물들이 저기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세계가 나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주..
더 정확히 뜻하자면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며, 어떤 것도 그자체로 가치로울 수 없으며, 타당하거나 수용가능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전 글에서 모든 것은 그자체로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라고 간단히 말했다. 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면 약초에 비유해 말했던(명의) "세상에 약초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긍정할 것이다. 또한 약초와 약초 아님을 우리 몸(마음)이 구분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우리 몸에 어떤 약초는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 된다. 덧불여 우리 몸이 변하면 약초와 약초 아닌 것도 변한다고 했는데, 다만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진화의 과정을 염두한다면 우리 몸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변하고 있으나 한평생의 몸은 유한하다. 때문에 한평생의 관점에서 좋은 것과 나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