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기관 없는 신체/일체유심조/구조적결정론 1.인은 유발할 뿐 결정할 수 없다. 싹이 트는 건 연에서 결정된다. 2.연은 욕망한다. 연은 욕망하는 기계다. 연이 접속하는 것에 따라 가령 입은 먹는 기계도 되고 키스 기계도 된다. 3.연은 기관 없는 신체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 정해진 바가 없다. 입 역시 그렇지 않은가, 입이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먹는-기계, 키스-기계...) 4. 궁합이 잘 맞는 인연은 열매가 크고 탐스럽다. 5.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이 있을까? 좋은 씨앗인지 아닌지는 연과의 만남에서 결정된다. 6. 좋은 씨앗도 없고 나쁜 씨앗도 없다. 7. 씨앗이 나쁘고 땅이 나쁘고가 아니라 서로 다르다. 8. 나쁜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다. 다만 나에게 좋고 ..
보이는가? 인스타그램에서 공유한 레고판이다. 나는 이 레고판을 이리저리 보다가 한 그림이 보였다. 나는 이전에 이 그림을 본 적이 있고 내게는 그 그림에 관한 앎이 있었다. 그 그림은, 고흐의 자화상이다. 레고는 고흐의 자화상이라는 정보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보는 사람이 레고에서 고흐의 자화상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레고판은 그냥 레고판에 불과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2. 레고판이 고흐의 자화상을 표현한 정보전달은 레고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혹은 듣는 청자에게서 산출된다. 정보는 매개되는 것이 아니다. 정보는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정보는 청자가 해석해 내는 것이고 청자에게서 결정된다. 이것이 청자의 해석학의 요점이다. 3. 레고판을 만든 사람은 레고에 자신의 정보를..
우리가 관찰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구분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는 새로운 체험 영역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해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구분 작동들을 통해 우리가 창조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통찰에는 불가피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일단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깨닫고 있는지 그리고 또한 이 깨달음을 깨닫고 있는지를 우리 자신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체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관찰자라는 개념은 관찰하기의 작동을 연구하고 '이해의 이해'가 가진 순환성을 직시하는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