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개념적인 구분들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선생님의 언어 사용을 이끄는 원리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생각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 모든 신조들과 더불어 선생님의 용어법은 인간 관찰자들의 체험들에 굳건하게 기초를 두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한 체험들에 대한 색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 생각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때때로 나는 아직도 존재론과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존재론적 고찰들을 개체 발생적 관점으로 대체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생성(becoming)의 과정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물론 이러한 요구에 마음이 끌리기는 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실재에 대한 거부,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관찰자들의 행동들 속에..
두 개의 구분되는 태도, 즉 생각하고 설명하는 두 가지 길들이 있습니다.[괄호 없는 객관성과 괄호친 객관성] 첫 번째 길은 괄호 없는 객관성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그렇다고 주장되는) 객체들이 관찰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진술들의 외부적 타당성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지요. 이러한 타당성은 권위와 무조건적 정당성을 '주장되는 것'에 넘겨줄 것이고, 그리하여 복종을 목표로 할 것입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들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부정하는 것을 함축합니다. 그들에게 귀를 귀울이려 하지 않거나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근본적인 감정은 보편타당한 지식의 권위에 의해 힘을 받습니다. 상호배제적인 초..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내가 관찰하기의 작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내가 끊임없는 자기관찰을 제안하거나 또는 어쨌든 추천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오해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내 작업에 대한 잘못된 해석 - 물론 이러한 잘못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 때문에 유명해졌을 겁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의 진정한 지혜는 영속적인 자기 고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찰의 역량에, (특정한 상황들을 정확하게 지각해내는 것을 방해하는) 이러저러한 신념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자발성에 있다는 것이 내 견해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을 관찰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지시하고 있는 궁극적 진리에 인도되고 있다는 것..
1. 요컨대 나는 나 자신을 구성주의의 대표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사 내가 반복해서 계속 구성주의자라고 불린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럼 선생님은 스스로를 뭐라고 부를 건가요? 어떤 종류의 명칭이 선생님의 입장이 갖는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줄까요? 대답이 망설여지는데요. 왜냐하면 이러한 명칭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명칭이 붙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합한 명칭을 요청받을 때마다 나는 종종 내 자신을 -진지하게, 그러나 장난스럽게- "슈퍼 실재론자"라고 부릅니다. 무수한 동등하게 타당한 실재들의 존재를 믿는 '슈퍼 실재론자'라고 말입니다. 더욱이 모든 상이한 실재들은 상대적인 실재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선생님은 유아론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재론자도 분명 아닙니다. 독일에서는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생님이 두 개의 인식론적 극단 사이의 중간 위치를 대표하는 구성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고전적인 유형의 구성주의는 외부, 심지어 절대적 실재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와 같은 실재의 내적이고 참된 형식을 결코 알 수는 없다고 가정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성물들이 실패하고 붕괴할 때가 되어서야 그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것들이 실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견해에도 역시 의견을 같이 하지 않습니다. 내가 구성한 것들과 실재 사이의 - 그 구성물들이 잘못된 것으로 입증된 - 그와 같은 충돌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누가 보여줄 수 있죠? 어떤 타당성이 이와 같은 가정 -..
조사께서 황매로부터 법을 얻으신 후 소주 조후촌에 돌아 오셨는데 아는 사람이 없고 유가의 선비 유지략이 후한 예로 대접했다. 유지략의 고모가 있었는데, 비구니가 되어 무진장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는 항상 열반경을 읽었다. 조사께서 잠깐 들이시고 그 묘한 뜻을 아셨으며, 그를 위해 풀이하여 주었다. 이에 비구니가 책을 들고 글자를 물었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글자를 알지 못하니 그 뜻을 물어 보라." "글자를 모르면서 어떻게 그 뜻을 알 수 있읍니까." "모든 부처님의묘한 가르침이 글자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비구니가 크게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어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덕이 높은 노인에게 말하였다. "저분이 틀림없이 도인일 것이니 마땅히 청하여 공양하라" 이에 진후의 현손인 숙량과 주민들이 다투워서 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