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볼 때 '관찰하기'란, 자기가 무언가를 관찰하는 데 관련되어 있다는 자각과 함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인간적 작동/입니다. 새를 단지 노려보고만 있는 고양이는 나에게는 관찰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고양이는 단지 새를 주시할 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 고양이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수 없으며, 또는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고 적절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고양이는 적절하게 또는 부적절하게 행동할 수는 있어도 그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성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관찰하기는 자기성찰이라는 말이죠? 맞습니다. 관찰자는 무언가를 구분하기 위해 어떤 구분을 사용할 때 자기의식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들은 무언가..
분명 선생님은 지금 혼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이 인터뷰의 체험이 선생님이 유아론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해주는 건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우리가 우리와 독립적인 어떤 것을 구분해 낼 수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음'의 체험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내가 볼 때 그 대답은 언어가 더불어 살기의 방식이자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가?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다.' 다음 질문은 이렇습니다. '누가 인간들인가?'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인간들이란 인간의 더불어 살아가기의 과정에서 구분되는, 그처럼 특별한 실체들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순환적인 상황에 놓여 ..
1.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일체유심조, 일체가 마음에서 일어난다. 2. 독자들은 마치 '사실'이나 물체가 저기 바깥에 있어서 그것을 그냥 가져다 머리에 넣으면 되는 것처럼 인식현상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늘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려는 모든 것의 근본이다. (앎의 나무 33) 3. "말해지는 모든 것은 관찰자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해지는 것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그것을 말하고 있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관찰자와 독립적인' 실재와 관련해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게다가 명백하게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다는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 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외부의 실재 또는 진리에 접근할 ..
감각들이 구성하는 느낌은 나와 모든 것이 일체가 되어 연결되어 있음을 체험하는 표상이다. 신체의 변용을 감각하는 관념인 느낌들은 외부에서 내부로 온 것이 아니라 일체 그 자체에서 출렁이는, 변용되는 느낌이다. 신체 외부 자극은 느낌들을 유발할 뿐 결정할 수 없다. 느낌으로 인식하는 변용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하는 일체의 변이만이 있을 뿐] 따로 외부가 없다. 반면 우리의 인식은 식별이 필요하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우리 생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연결된 일체의 변이가 좋은 쪽으로 표류하도록 주의를 기울려야 하므로 나의 신체 변용의 관념은 차이를 분별한다. 오직 차이만이 존재한다. 주의할 것은 좋다 나쁘다가 정해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일체는 늘 변하기 때문에.[좋은 것이 나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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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진리다 이름 붙이는[정의 내리는]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2. 정말이지 우리는 어떤 것이 주어져 있고 존재한다는 바로 그러한 관념이, 그리고 어떤 실재나 어떤 종류의 진리에 준거한다는 것이 불가피하게 언어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매우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진리 또는 실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건 모두 언어의 이용가능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것은 오직 언어를 이용할 수 있을 때에만 서술이 가능해지고, 또 언어에 의한 구분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순수의식의 상태에 옮겨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명상 과정에서 조차, 우리는 그와 같은 상태의 성찰이 언어 없이는 달성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3. ..
아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되기를 바라지만, 세상 이치가 바라는대로 다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아도 괴로워할 일은 아니다. 하면 좋고 하지 않아도 별일 아니다. 내가 바라는대로 아들이 해야한다는 기대가 어리석다. 고로 아들 때문에 괴롭다면 나 때문이다. 내가 어리석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노력한다고 다 잘 되진 않는다. 또 실패했다고 낙담할 건 아니다. 그냥 할 뿐이다. 아들아, 되면 좋고 되지않아도 별일 아니다. (남을 해하지만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