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령 어떤 이유로 그 기계의 전달 기능을 잊어 버렸다 하더라도 투입과 산출을 시도해 보기만 해도 우리는 그 기계의 기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분석 실험은 간단합니다. 이게 그런 기계가 선호되는 이유입니다. 우리 서구 문화는 이런 타입의 기계에 빠져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계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을 향한 우리의 동경의 총체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자동차를 다시 단순한 기계로 새로이 만드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때에 따라서는 필수적인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런데 자연을, 우리 인간을, 우리의 환경을 단순기계로 바꾸는 덜 의미 있는 시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자주 단순치 않은 방식으로 (단순기계와는 달리) 행동하는 아이들을 사회적으로 다루는 방식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
1. 사람들은 어느 날은 달이 어떤 특정한 위치에 있는 것을 보고 다음 날은 다른 위치에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는 두 개의 관찰을 소위 자연법칙을 통해서 묶어 냅니다. 자연법칙이 달의 위치변경을 초래했다고 말하는 거죠. 그리고는 이런 것을 인과적 설명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인과적 설명은 삼원적 (세 가지 원소를 포함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인, 결과 그리고 변형의 규칙을 포괄합니다. 이를 사람들이 관찰한 변화에 깔린 법칙이라 합니다. 손가락 사이에 백묵을 끼고 있다가 손가락을 벌리면 백묵은 땅에 떨어집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백묵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원인으로는 손가락을 벌리는 것이 되고 결과로는 백묵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변형의 규칙으로는 중력이 언급됩니다. 물론..
당신은 지금 법률적이고 규범적인 법칙과 기술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자연법칙이라는, 서로 구분되어야 할 두 개의 범주를 섞어서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 두가지 범주의 공통점은 사람이나 자연이나 법칙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고 여기는 강제구조입니다. 저는 법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 순간 이미 감옥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저 달아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어찌됐건 저는 묻고 싶습니다.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뭘 의미할까요? 누군가가 사과를 훔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만약 그 사과도둑이 자신은 사과를 다만 빌렸고 나중에 되돌려 주려 했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얘기가 받아 들여 질까요? 어떤 행동(움직임)에 명백히 맞지 않는 법칙이 있다면 그 법칙을 우리는 바꾸면 안 되나요? 누가..
당신이 그렇게도 파괴적이라고 여긴 그 진리이념이 어떻게 가볍고 유연하고 관용적인 방식으로 비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군요. 진리독단론에 대한 비판이 사람을 독단적인 반독단론자로 만들지 않을 수도 있군요. 그러니까 유연성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방법 혹은 언어를 사용해야 하나?하는 의문이 듭니다. 제게는 유머러스하고 장난기 어린 체스처가 중요합니다. 재미, 유머 그리고 위트가 제게는 가능성들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파멸적인 사고의 범주들이 뒤로 물러나게 만들고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그러한 놀이로 사람들을 초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제 학생들과 약속했습니다. '실재' '사실은' '진리' '객관성'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몇 달러씩 내서 그 돈을 모아 함께 사용하기로 말입니다. 2달러를..
선생님은 모든 종류의 체험이 정당하다고 매우 강하게 옹호하는 이러한 견해가 윤리적인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실재가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이 권위적이고 보편타당한 진술들을 가질 수 있다는 신념과 부합한다는 것을 잊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어떤 종류의 체험을 불신하게 하는 데 이용될 수 있습니다. 진술을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실재에 준거하는 것입니다. 권력, 지배 그리고 통제에 기초를 둔 문화에서,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그 자신의 견해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해 줍니다. 그렇지만 실재에 다가갈 수 있는 단일한 특권적 접근권이 없으며, 지각과 환각이 체험의 현실적 과장에서는 구분될 수 없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