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 10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 순간 0에서 10이라고 하는 관계중에서 0은 사라져버리고 10만 남게 인식되서 10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현상을 만들어서 대상을 이해하게 하는 힘을 法化된 힘, 즉 종자라고 부른다. 근데 이 10을 알아채는 것이 무상한 삶을 살아가는 즉 자기 생명을 살아가기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인데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뚜렷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意는 우리가 지식 한계, 한계에 갇힌 틀을 동시에 만든다. 의는 無明에 상대되는 明이 특징이 있고, 그 무상한 변화가운데 다름을 명확히 알아야하는 그런 명이 있고 동시에 그 다름으로써 무엇을 속성짓는 무명이 있다. 의라고 하는 것은 동시에 명이면서 그 자체가 무명이 되버린다. 우리가 뭘 안다고 하는 것은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아는 것이 일어나는 순간 동시에 모르는 것이 되버리는 묘함 속에 빠져 버린다. 만일 이 명 그 자체가 무명이 아니라고 하면 명과 무명은 서로 다른 실체를 가진 것처럼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明의 세계가 있고 무명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게 된다. 따로따로 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세계는 연기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묘하게 명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무명이 되는 것을 중생의 삶이라하고 명이면서 그것이 虛妄分別인줄 분명히 자각하는, 이때 이 명은 覺, 자각하고 다르죠. 무명의 입장에서 보니까 覺이 있는 것이다. 이 자체가 覺하고 보니까 그 명이 그대로 覺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따로 覺을 하는게 아니고 우리 근본 실성 자체가 매순간 明으로써 자기 특징을 나타내는 覺하고 있는 단계다. 이런 것들은 실재로 意에서 일어난다의에 모든 차별이라는 하는 것이 그 자체로 무상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본질이라고 비춰지기 시작하면 이제 의가 의로써 작용하지 않고 平等性智로써 작용한다. 견도에만 오르게 되면 일체 모든 다름들은 다 다름을 가지고도 최고의 생명 가치를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은 다름이 더 위대하고 이와같은 다름이 더 떨어진다라고하면 사람이 풀에 비해서 더 위대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사라진다. 풀과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한 생명의 관계장에서 사람이고 풀이 되버리기 때문에 풀이 사라지면 생명도 살 수 없다라고 하는 그 다름 속에서 온전한 생명의 표현인 것을 분명히 알아가는 평등을 의가 지혜로 변했다하는게 완벽한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게 되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無等等이라고 표현한다. 일체 모든 차별이 그 자체로 부처다라고 이야기한다. 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나눠서 시비라고 하는데 맞추는 게 아니고 반야심경이 말하는 무등등은 부처님의 다른 명호입니다. 이 무등등은 마음에 무상한 알아차림에 意해서 無等等이 부처님으로 자리하기 때문에 곧바로 여기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등등이 되고 그럼으로써 일체모든 중생들은 마음에 활동에 의해서 평등하게 된다. 여기서 화엄에서 말하는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이 전혀 다름없이 평등하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그 특징 자체가 의라고 하는 사고력 속에 숨어있다. 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각이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게 아니고 의에 활동 가운데 무명이면서 명인 가운데 무명의 요소가 사라지면 의 그대로 무등등이며 평등성지인 마음이 되고 마음이 곧바로 부처가 되서 온세계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의의 활동은 대단히 중요하다." [각주:1]  

 

 

  1. 정화스님, <유식강의> 녹취록 중에서 [본문으로]

'정화스님의 <생활속의 유식30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심소  (0) 2012.10.22
변행심소  (0) 2012.10.22
평상심  (0) 2012.10.19
삼계를 벗어나는 힘  (0) 2012.10.19
제8식  (0) 2012.10.17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