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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생님이 규칙들과 규범들을 정식화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계율과 어떤 유사성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생님은 무어라고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예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전쟁들과 파멸들에 연루되어 온 기독교 교회들은 예수가 말한 것을 2천 년동안이나 계율로 해석해 왔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이웃을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총을 준비해 두어야 하고 방아쇠 위에 손을 얹어 놓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물음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것을 원하는가? 우리는 밤낮으로 총을 들고 돌아다니기를 원하는가? 불안과 불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만일 이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들의 이웃들을 사랑해서도 안 되고, 그들을 신뢰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웃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불신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기 휴대를 위한 분명한 이유가 만들어집니다. 

역으로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식으로 행동한다면, 이번에는 당신이 그들로부터 존중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어린이를 신뢰한다면, 그 아이가 이번에는 당신을 신뢰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지금, 우리가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을 타자들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기회주의일 뿐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합니다. 
(함으로 338)


2.

제가 볼 때는 객관성과 책임감 있는 행위의 관계는 정확히 거꾸로 살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인식된 객관적 진리를 지침으로 삼는다는 것은 책임감 있는 참여의 토대를 상당 부분 형성하는 것으로 말이지요.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이러이러하니까. 예를 들면, 자연파괴가 실제적으로 진행되니까,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식이죠. 또 거꾸로, 객관적으로 인식 가능한 실재에 대한 이념으로부터 결별한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는 식의 합리화로 해석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도 더 이상 실제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당연합니다. 괴테의 아름다운 시 '산꼭대기 너머에는 안식이 있다' 역시 수십만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 예수의 '누가 한 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내밀어라'는 말도 사람들의 빰을 때리라는 요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요. 일정 기간 동안 늘 다른 쪽 뺨도 내밀어 주게 되면 사람들은 용기를 얻어 뺨을 때리게 되고 그러고는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니까요.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모든 것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소위 해석학적 근본이념 혹은 청자(듣는 사람)의 해석학입니다. 어떤 진술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말하는 이가 아니라 듣는 이라는 청자의 해석학 말입니다.  (발명품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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