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종류, 즉 알로 나는 것, 태로 나는 것, 습기로 나는 것, 화하여 나는 것, 빛이 있는 것, 빛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내가 다 완전한 열반에 들게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로 제도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강경>
2.
니체는, 자기 자신이 체험했기 때문에 한 철학자의 생애를 신비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철학자는 금욕적인 덕목들-겸손, 검소, 순수-을 독점하여, 그것들을 아주 특별하고 새로운, 실제로는 거의 금욕적이지 않은 목적들에 사용한다. 철학자는 그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삼는다. 철학자에게서 그것들은 도덕적 목적들도, 또 다른 삶을 위한 종교적 수단들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그 자체의 <결과들>이다. 철학자에게는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겸손, 검소, 순수는 이제 아주 풍부하고 넘쳐흐르는 삶, 능력으로 충만한 삶의 결과들이 되어, 사유를 정복하고 다른 모든 본능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Nature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욕구에 기초해서, 즉 수단과 목적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 아니라, 생산, 생산성, 능력에 기초에서,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 겸손, 검소, 순수 이것들은 그[철학자]에게는 현자가 되는 방식이고, 자신의 신체를 지나치게 오만하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며 지나치게 육감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전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p10
3.
끝으로 우리는 우리 관점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싶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의 핵심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데, 앎을 모른는데 있다.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앎이 아니라 앎의 앎이다. 폭탄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앎이 아니라, 우리가 폭탄으로 무엇을 하려하는냐가 그것을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한다. 우리는 흔히 이런 깨달음을 무시하거나 못 보게 스스로 억누르면서, 우리의 일상행위에 대한 책임을 떠맡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모든 일상행위는 빠짐없이) 세계를 산출하고 굳히는 데 이바지 한다. 우리가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세계를 산출하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 행위의 초월성을 보지 못하면, 우리가 부응하고자 하는 상(像)과 실제로 산출하는 존재를 혼동하게 된다 .이런 잘못은 오직 앎을 알아야만 고칠 수 있다.
이제 이 책의 끝에 다다랐다. 이 책에서 우리는 독자들을 성찰의 자리에 초대했다. 성찰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의 인식활동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 인식을 자기 행위의 길잡이로 삼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독자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앎의 나무 279)
4.
나는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나는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그만두었고 내 자신을 그것들[사물들]과 부당하게 동일시했던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죽음과 마주침으로써 나는 내가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순간적임을, 오직 변이일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옹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붙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더 성찰적이게 되었고 덜 교조적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나 자신을 '모든 세속적인 유대를 초월하는 영광스런 존재'로 서술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은 너무 강렬했고 그래서 나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함으로 181)
5.
옛날에 어질고 현명한 왕이 있었다. 연일 국정에 몰두하던 왕이 모처럼 짬을 내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아침 일찍 떠났다가 저녁에 환궁할 요량이었는데, 사냥에 심취한 나머지 미처 해가 기우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날이 너무 어두워 궁궐까지 돌아갈 수가 없었다. 충직한 신하들은 애가 탔다. 왕이 말했다. 저기, 저 민가에서 하루 묵도록 하자. 신하들은 펄쩍 뛰며 두 팔을 내저었다. 어떻게 전하께서 누추한 여염집에 들 수가 있겠느냐며, 밤길을 재촉해서라도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때 왕이 말했다. 내가 저 집에 들어가면, 내가 백성이 되겠느냐 아니면 저 집이 궁궐이 되겠느냐.
(문학동네 20호, 1999년 가을, <박상륭 인터뷰글>)
6.
의심할 바 없이 나의 어머니가 나의 정신적이고 지적인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세계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가르쳤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내가 형과 놀고 있을 때 어머니가 우리를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그 때 나는 11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죠. "얘들아!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단다. 어떤 행동은 적합할 수도 있고 부적합할 수도 있고, 옳거나 틀릴 수도 있단다. 그래서 어느 쪽을 정하는냐는 너희들의 책임이란다." 그리고는 덧붙여 말씀하셨지요. "좋아, 이제 다시 나가 놀으렴."
이 일화가 선생님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어떤 행위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으로 분류될 수 없다면, (내가 깨달은 바가 이것인데) 우리는 그 행위가 끼어들어가는 관계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우리의 행위양식을 자율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내게 있어서는, 하나의 특별한 태도가 여기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한 태도는 나와 형의 내면에 신뢰를 불어넣어주고, (존중심을 갖고 다루어져야 하는) 모든 인간의 자율과 자유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해 줍니다. 어느 것도 무조건적으로 고정된 타당성을 갖고 있지 않고, 그래서 헤아려 보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요.(함으로 228)
'체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아차리기[시비심] (0) | 2020.08.03 |
---|---|
내가 최애하는 문장들 2. (0) | 2020.08.02 |
게임 중독의 사법계 (0) | 2020.08.01 |
결정할 수 없는 문제와 소통 (0) | 2020.07.31 |
괴로움과 선택 (0) | 2020.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