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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른 것이 없고 서로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서로의 기준에서 보면 서로가 다 맞다. 내가 맞고 네가 틀린 게 아니다.

너도 맞고 나도 맞는 이 다름을 조정하려면 어찌하나.
내가 맞추면 된다. 서로 서로의 기준에서 양보하고 타협하여 맞추면 좋을 것이다. 서로의 기준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기준을 이해하면 충분하다. 그런데 상대가 맞추지 않으면. 상대가 맞추길 바라기보다 내가 맞춘다. 등돌리는 방법 말고 달리 방법이 없다면 말이다. 이 역시 상대의 기준을 이해하고 처신하는 것이니 나의 기준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참을 바도 없다. 입맛이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식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입맛이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시키지 않고 더불어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 다양하고 바람직함은 다르다는 것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2.
<장자>식으로 말하면 양행한다. 원숭이들의 기준에선 조사모삼이 옳다고 보고 주인의 기준에선 조삼모사가 옳다. 주인은 원숭이들과 싸우지 않고 원숭이들에게 맞춘다. 왜그런가? 서로 기준이 다를 뿐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헛되이 애를 써서 한쪽에 치우친 편견을 내세우면서 실은 모두가 하나임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조삼(朝三)이라 한다. 조삼이란 무엇인가? 원숭이를 부리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상수리를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다."했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 그래서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다."하니까 원숭이들이 모두 좋아했다. 명칭(표현)도 내용(실질)도 변함이 없는데 기쁨과 노여움이 일게 되었다. 역시 자연 그대로의 커다란 긍정(肯定)에 몸을 맡기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시비를 조화시키고, 자연의 균형(天均)에서 쉰다. 이러한 것을 양행(兩行)이라고 한다."
<장자> 재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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