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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추한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선하게 보이는 것을 선한 것이라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본시 유(有)와 무(無)는 상대적인 뜻에서 생겨났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도 상대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며, 긴 것과 짧은 것도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데서 있게 되고, 높은 것과 낮은 것도 상대적인 관념에서 있게 되며, 음악과 소리도 상대적이 소리의 조화의 구별이며, 앞과 뒤도 상대적인 개념의 구별에 불과하다.

그래서 성인은 무위(無爲)하게 일에 처신하며,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만물을 생성케 하면서도 얘기하지 않으며, 생겨나게 하고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며, 그렇게 되도록 하고서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으며, 공로를 이룩하고서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공로가 그에게서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각주:1]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己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己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響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辭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

 

T1000.0 : 도덕경 2장의 전반부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상은 불교의 '공(空)'이다. 아름답고 추한 것이 본래 정해져 있지 않고 유무, 난이, 장단, 고하, 음향, 전후가 모두 상대적인 분별이다. 이어 후반부는 실상 모든 게 空함으로 성인의 삶은 무위, 함이 없는 함으로 행하고[순수], 활동 그 자체가 말없는 가르침이 되고 생겨나게 하면서도 소유하지 않는 '검소함'과 공로를 이룩하고서도 자랑하지 않는 '겸손함'으로 채우는데, 요컨대 성인은 순수, 검소, 겸손의 덕목을 목적으로서, 도덕으로서가 아니라 無爲로 처신한다. 

 

니체는, 자기 자신이 체험했기 때문에 한 철학자의 생애를 신비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철학자는 금욕적인 덕목들-겸손, 검소, 순수-을 독점하여, 그것들을 아주 특별하고 새로운, 실제로는 거의 금욕적이지 않은 목적들에 사용한다. 철학자는 그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삼는다. 철학자에게서 그것들은 도덕적 목적들도, 또 다른 삶을 위한 종교적 수단들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그 자체의 <결과들>이다. 철학자에게는 또 다른 삶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겸손, 검소, 순수는 이제 아주 풍부하고 넘쳐흐르는 삶, 능력으로 충만한 삶의 결과들이 되어, 사유를 정복하고 다른 모든 본능을 자신에게 종속시킨다.-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자연Nature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욕구에 기초해서, 즉 수단과 목적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 아니라, 생산, 생산성, 능력에 기초에서,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영위되는 삶. 겸손, 검소, 순수 이것들은 그[철학자]에게는 현자가 되는 방식이고, 자신의 신체를 지나치게 오만하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며 지나치게 육감적인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전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p10

 

 

 

  1. 김학주옮김, <노자> p13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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