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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잠수함 안에서 한 번도 밖으로 나온 적 없이 평생을 살면서 잠수함을 잘 조종하게 되었다고 치자. 우리가 바닷가에 서 있는데 이 잠수함이 접근해 물 위로 사뿐히 떠올랐다. 이것을 지켜본 우리는 조종사에게 무전기로 "축하합니다. 암초를 피해 수면 위로 멋지게 떠오르셨군요. 잠수함을 완벽하게 조종하셨습니다."하고 말한다. 그런데 잠수함 안에 있는 조종사는 어안이 벙벙하다. "도대체 '암초'가 뭐고 '떠오른다'는 게 뭐지? 나는 그저 지레를 움직이고 단추를 눌러 매순간 계기가 가리키는 것들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생기도록 했을 뿐인데. 언제나처럼 이미 정해진 순서대로 말이야. 난 '조종'이란 것을 한 적이 없어. 게다가 뭘 보고 '잠수함'이라고 떠들어대는 거야?"
잠수함 안의 조종사에게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계기가 가리키는 것들과 그것들의 변화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 특정 관계를 산출하는 방법 뿐이다. 잠수함과 주위 환경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우리에게만 잠수함의 '행동'이 존재한다. 그리고 오로지 우리에게만 행동은 그때그때의 결과에 따라 적절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논리적 접근방법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환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잠수함의 이동과 움직임을 잠수함 자체의 작업방식 및 내적 역동성과 혼동하지 말아야한다.
바깥세계를 모르는 조종사가 탄 잠수함의 역동적 상태변화란 결코 바깥의 관찰자가 보듯이 세계에 대한 표상들을 가지고 작업한 결과가 아니다. 이 역동성은 '바닷가', '암초', '수면' 따위를 포함하지 않는다. 오직 계기가 가리키는 것들 사이의 상관관계가 어떤 범위 안에서 존재할 뿐이다. 바닷가, 암초, 수면 등은 오직 바깥의 관찰자에게 타당한 실체들이다. 잠수함에게 또는 잠수함의 구성요소로 작업하는 조종사에게 이런 것들은 타당하지 않다.
이 비유에서 잠수함에게 타당한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눈이 돌아간 개구리와 늑대소녀에게도 적용되고 우리 각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2.
무아, 실체는 없는데 작용은 있는. 이중보기, 두 개의 관점.
3.
구조적 결정론과 구조 접속의 이중보기. 폐쇄적 결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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