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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법을 전수할 때는 예부터 해왔듯 말없이 전수해야 하지만, 큰 서원을 세우고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당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이와 같은 견해에 동의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뜻도 없다면, 그곳에서는 쓸데없이 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옛 어른의 뜻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누구에게도 이익이 없습니다.
<육조단경> p146
T1000.0 : 법을 말없이 전하는 이유는 스스로 깨닫도록 하게 함이겠지만 내 생각에 깊은 뜻은 이렇다.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은 듣는 이가 원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그러나 듣는 이가 원하지 않아도 불법은 전할 수 있는데 바로 말이 아닌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다. 가령 상처받은 어린 아들이 있는데 그에게 불법을 이야기하고 가르치는 것보다 불법의 마음을 내어 그를 대하면 그 자체로 말없이 전수하는 것이 된다.[왜냐면 불법은 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은 말없은 가르침을 언젠가 깨닫게 될 수도 있고 또 아빠의 편에서는 365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불법을 전하는 것이 된다. 선가禪家에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스승이 하는 것은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하기 보다 마음을 다해 전하기에 차를 마실때나 잠을 잘 때나 일을 할때나 늘 항상 전하고 있다. 말없이. 분별없이.
특정한 가르침만이 절대의 진리를 표상하고 있다는 생각은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과 같으므로 필연적으로 분열과 다툼의 근거를 형성하게 됩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진리란 경전 속에 표상되어 있는 언어 문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을 보는 사람의 번뇌가 소멸되어, 경전의 언어가 사람의 일상에서 살아나는 경우에만 경전이 진리를 표상한 것과 같습니다. 번뇌 없는 사람의 일상이 진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 정화스님, <육조단경>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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