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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부처가 되어야 중생이 아닌 듯하지만, 애초부터 중생과 부처라고 할 것이 따로 없으니, 중생 그대로가 부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라는 특별한 모습으로 변해야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뭇 생명(衆生) 모두가 우주 법계의 역사를 담아 지금의 모습으로 생명 활동을 하기에 하나의 생명이면서 여러(衆) 생애(生)의 생명이 되기 때문이며, 인연으로 어울린 생명관계에 의해서 하나의 생명도 그 모습 그대로 뭇(衆) 생명(生)이 되기 때문입니다. 곧 생명마다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 않고도 시방 삼세의 모든 생명을 담아 자신이 되는 것이니, 생명은 원래부터 그 모습 그대로 특별합니다. 특별한 존재 가치를 구현해야 자신이 생명으로서 존재 이유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존재 이유야말로 만들어진 이미지로 자신을 얽어매는 허상이 도고 뭇 생명을 묶는 끈이 됩니다.

그 모습 그대로가 존재 이유이므로 더 이상 다른 존재 이유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만들어 그것으로 삶을 재는 척도로 삼는 것은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로 만들 뿐만 아니라 이웃조차 부족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니, 만들어진 이미지야말로 생명 현상을 왜곡하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도 머묾 없이 법게의 인연과 함께하는 마음은 어떤 이미지에도 머물지 않기에, 만들어진 이미지는 생명활동의 역사만큼 생명의 흐름과 동떨어집니다. 분별을 만들지만 분별된 모습에 머물지 않는 것이 생명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생명의 활동을 지각하는 것이 분별에 머물지 않는 앎과 기억으로, 부처님의 지혜입니다. 마음 하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연의 분별들을 잘 살펴 알아차리면서 분별된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 앎입니다. 중생이라는 존재 이유가 부처라는 존재 이유로 바뀐 앎이 아니라 머물지 않는 생명 활동을 지각하는 앎입니다. 부처라는 존재 이유를 만들어 갖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뭇 생명명의 생명활동인 머물지 않는 인연의 흐름을 자각하고, 분별하여 갖고 있는 이미지에 매이지 않는 앎이야말로 생명 본연의 모습을 자각한 앎이며, 그것이 생명의 존재 이유임을 아는 앎이며, 더 이상 허상에 속지 않는 앎입니다. [각주:1]

 

T1000.0 : 1. 뭇 생명[중생] 그대로의 모습이 부처의 세계[임을 앎],

2. 나는 실재성과 완전성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스피노자 <에티카> 2부, 정의 6.)  

 

 

  1. 정화스님 <육조단경> p26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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