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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윤리학>

부증불감

T1000.0 2012. 11. 23. 13:56

그런데도 만일 어떤 사람이 지금 '왜 우리는, 본성적으로, 양을 분할하는 경향이 있는가'하며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우리는 양量을 두 가지 방식으로 파악한다. 하나는 추상적으로 또는 피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가 <보통> 양을 표상하는 것과 같다. 다른 하나는 실체로 파악하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는 <표상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지성에 의해서만 파악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표상력 속에 있는 그대로의 양에 주의한다면-이것은 우리가 자주 그리고 더욱 쉽사리 취하는 일이지만 -양은 유한하고, 가분적이며,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성 속에 있는 그대로의 양에 주의하여 실체인 한에 있어서의 그것을 파악한다면 -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 우리가 이미 충분히 증명했듯이, 그것은 무한하며, 유일하고, 불가분적인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지성과 표상력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 모두에게 충분히 명백할 것이다(특히 물질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고, 부분들은 우리가 물질을 다양한 양식으로 변용한 것으로 파악하는 한에 있어서만 그것 속에서 구별되며, 따라서 그것의 부분들은 양태적으로만 구별되고, 실질적으로는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에도 유의한다면). 예컨대, 물은, 물인 한에 있어서, 분할되어 그것의 부분들이 서로 분리되지만, 그것이 물질적 실체인 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파악한다. 왜냐하면 실체인 한에 있어서의 그것은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물은, 물인 한에 있어서, 생성되고 소멸하지만, 실체인 한에 있어서는 생성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각주:1]

 

T1000.0 : 양을 두 가지 방식으로 파악한다. 증감으로 파악하는 것과 부증불감으로 파악하는 방식. 전자는 표상력에 도움을 받아 늘고 줄고의 양을 판단하는 것이고 후자는 표상력이 아니라 실체인 한에서, 불교적 용어로 표현하면 진여법성인 한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비유로 든 물이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나눌 수 없고 무한하고 부증불감의 하나로 존재하는 실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것은 실체와 그것의 변용인 양태인데, 실체와 양태가 별개가 아니라 실체가 양태로 변용되는 또는 실체의 변용이 양태로 표현되는 하나의 장으로서의 실체를 스피노자는 '신'이라 부른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신은 불교적 관점의 법신과 회통한다.       

 

 

 

 

  1. <에티카> p7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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