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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뚜라나   바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은 체험들의 유사성이 결코 구조적 결정론을 반박하지는 못합니다. 약을 먹는 것은 특유한 구조들을 갖는 분자들을 당신의 유기체 속으로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유기체의 일부가 되고 그것은 신경체계 구조를 변경시킵니다. 약을 먹는 것은 특유한 구조들을 갖는 분자들을 당신의 유기체 속으로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유기체의 일부가 되고 그것의 신경체계 구조를 변경시킵니다. 하지만 '일어나는 일'은 신경체계 자체의 구조에 의존할 것입니다. 당신이 집어삼키는 물질에 대응하는 유기체 내부의 수용체들이 없다면,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억해 두어야할 것은 수용체가, 문제되고 있는 물질 - 예컨데 약-의 구조에 부합하는 특유한 분자적 배치라는 점입니다. 이런 식으로 유기체 내의 변화가 유발됩니다.(『있음에서 함으로』p112 강조는 인용자)

 

 약과 마찬가지로 독도 우리 몸에 들어와 치명적인 독이 되려면 우리 몸의 분자적 배치가 그에 부합하여야 한다. 독은 그자체로 독일 수 없다. 나아가 어떤 계기로 내 몸의 변화가 유발되어 분자적 배치가 독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독은 더이상 독이 아니다. 물론 구조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유전자적, 분자적 배치가 쉽게 변할리도 경계가 없이 변할리도 없을 테지만 일상의 경험에서 보면 약을 통해 예컨데 항생제를 복용해 내성이 생겨 약효과를 생기지 않는 현상은 분자적 배치가 약에 부합하지 않는 배치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다. 

 몸의 어떤 분자적 배치가 있고 그 배치가 바뀌는 것을 보면서 마찬가지로 마음의 배치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배치를 감정적 배치라 하면 남에게 듣는 쓴소리나 욕이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하려면 마땅히 그에 부합하는 특유한 감정적 배치가 있어야한다. 그리고 어떤 계기를 통해 감정적 배치가 바뀌면 그전에 들었던 욕이 전과는 달리 전혀 감정을 상하지 않게 된다. 감정적 배치도 그렇지만 나아가 생각도 마찬가지여서 생각의 배치가 바뀌면 일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 불교를 믿지 않아도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는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누구나 경험하고 즐겨 쓴다. 어느 목사님의 트위터글을 보니 "우리의 기준이 달라지면 우리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달라져요."라고 하는데, 이는 '일체유심조'의 또다른 표현이 아닌가 한다. '마음에 달려있다' '기준이 바뀐다'는 것은 생각의 배치가 바뀐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생각이 들어왔다는 것이 아니고 이전의 배치가 다른 배치로, 새로운 배치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내 생각에 배치가 바뀌는 이유는 괴로움, 병, 불편함이 몸에 그리고 관계에 존재하기 때문인데 이는 몸의 분자적 배치나 마음의 감정적 배치가 그에 부합한 상태로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배치를 바꾼다는 것은 건강, 조화, 일치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삶은 몸과 마음의 건강과 타자와의 조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동어반복이지만 건강과 조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삶은 괴롭다.

약이 그자체로 약이 아니고 독이 그자체로 독이 아니므로 현재 내 삶이 무엇인가에 의해 괴롭다면 그 무엇이 나의 감정적 배치와 부합하기 때문에 괴롭다. 나의 감정적 배치가 바뀌면 혹은 생각의 배치를 바꾸면 나를 괴롭히는 '무엇' 혹은 '관계'는 나의 감정적 배치나 생각의 배치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 아무런 괴로움도 줄 수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배치가 치유한다.' 

불교에서 행하는 참회의 절하기는 바로 이 감정적 배치를 바꾸는 수행이다. 

참회로서 절을 하는 것은 몸을 움직여 마음의 배치를 바꾸는 행위다. 참회는 절을 하는 동안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는 것이니 참회를 통해 나의 감정적 배치를 바꾸는 것이다. 감정적 배치가 바뀌면 괴로운 관계는 더이상 괴로운 것이 아닌 게 된다. 하므로 배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병을 치유하고 삶을 행복하게 살기위해 올바른 배치를 추구해야할 것은 물론이고 수시로 변하는 환경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배치는 끊임없이 변화를 맞아야할 것이다. 말하자면 중도(中道)[각주:1]의 배치가 필요하다. 단 배치는 몸과 마음 그자체가 기준이 되어야하지 욕구와 목적, 소유 등의 이기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배치는 조화를 깨고 행복을 등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그 자체가 기준이 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몸도, 마음도 그리고 둘의 조화에 관해서도 너무도 무지하기 때문이다.

 

 

 

 

 

 

 

 

         

  1. 중도에 관해서는 본 블로그 <제왕학에서 리더십으로1.2.3>글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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