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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내가 '바라는 바가 없이 베푼다'는 무주상 보시에 크게 공감해 나자신 뿐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처럼 그러길 바라거나, 확신시키려하거나, 지시명령 한다면,
자기 모순에 빠진다.
법을 주장하면[세우면] 법 아닌 것이 소외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고 말한 게 된다. 무주상보시를 하면 옳고, 안하면 틀린 게 되버린다.
옳고 그름은 없고 서로 다를 뿐이라고 나는 말하면서 서로 다른 너와 나를 나와 동일하게 만들려는 나는, 기막힌 자기 모순에 빠져버린다.
모순에 빠지면 의도와는 반대로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옳다 그르다의 시비심을 일으키면 옳다는 그르다를 소외시키고 옳다로 동일화시키는 강제[지시명령]를 내포된다. '내 말대로 해!' 복종시키려한다(신사적으로 말하든 협박을 하든 모두 똑같은 경우다). 인간이면 누구도 독재자가 될 수 있다. 학교 안의 독재자. 교회 안의 독재자. 가족 안의 독재자. 토론장의 독재자. [물론, 복종은 거부된다]
이 기묘한 자기 함정을 피하고 나의 의도가 효과적으로 성공하기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초대하는 것 뿐이다.
"당신은 어떤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이 선택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믿음과 행위들에 내재해 있는 결과들을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도록 강제하거나, 사물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다소 폭력적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2.
선생님이 일관성을 지키고자 한다면,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생님의 생각에 동의하라고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배와 조작을 용인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어떻게 사람들을 확신시키죠?
나는 결코 누구도 확신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 생각들을 접하고는 골치 아파 합니다.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나는 결코 그들의 견해들을 교정해서 내 자신의 생각을 그들에게 강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사람들은 지난 20여년 동안 내가 출간한 것들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것들이 그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가 쓴 것을 단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강의를 들으러 오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나의 성찰들을 따르고자 하는 초대입니다. 내가 해야할 유일한 일은 나와 대화하려 하고 대화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나는 논문과 책들을 쓰고 학생들과 작업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어쩌면 한 젊은이가 독일에서 칠레로 건너와 나를 방문해서는 더 꼼꼼하게 세부적인 것들에 해대 물을지도 모르지요. (함으로 78)
3.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과 문장과 글귀를 듣고 실다운 믿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여래가 열반에 든 뒤 후오백세에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 있으면 이 문장과 글귀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 이로써 실다움을 삼을 것이니,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삼`사`오 부처님에게 선근을 심은 것만이 아니라 저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처소에 이미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문장과 글귀를 들으면 한 생각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니라.
4.
선생님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그들을 초대한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초대라고 하는 것은 신속한 행동이 요구 될 때에는 커다란 맹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의상 정당하게 거절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률을 공포하고 규범을 정식화하는 사람들은 속도라는 엄청난 이득을 봅니다. 필요한 권력이 주어지면, 그들은 사람들에 대한 신속한 통제를 획득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목적들과 의도들과 관련해서 그들을 신속하게 정렬시킵니다. 어쩌면 초대들은 때때로 솔직히 너무 늦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일 수 있을까요? 자유의 황홀한 이점들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사슬에 묶어야만 할까요? 폭력을 거부하라고 우리가 사람들을 강제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접근법은 결코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내 견해는 이렇습니다. 소위 윤리적 법률과 규범들조차도 성찰의 가능성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의 토대들을 제거하고 복종을 요구합니다.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폭정을 위한 또 하나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어떤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이 선택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믿음과 행위들에 내재해 있는 결과들을 그들에게 제시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도록 강제하거나, 사물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다소 폭력적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함으로 79)
선생님은 또한 좀더 바람직한 형태의 새로운 종류의 사고를, 좀더 바람직한 형태의 '더불어 살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변화를 전혀 바라지 않는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존중을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깨달음에서의 변화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식으로건 강제에 의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개인의 통찰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비록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단순한 생각이 불가피하게 폭정의 유혹에 직면케 한다 할지라도 내가 분명 다른 종류의 세계를 원할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나는 서로를 존중하는 협력적 개인들이 구성하는 민주적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계를 갈망합니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더불어 살기'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압력과 폭력 없이 실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민주주의를 살아 있도록 유지하기 위해 민주적으로 고무된 개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여행이 곧 목적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용 가능한 수단은 내가 도달하고자 원하는 목적의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누구에게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입니다. (함으로 79)
5.
그렇지만 실재에 다가갈 수 있는 단일한 특권적 접근권이 없으며, 지각과 환각이 체험의 현실적 과정에서는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인간이 '일이 이러이러하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이 공통적인 통찰의 공간, 협력의 영역을 열어 놓습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는 정당한 타자가 됩니다. 우정, 상호존중, 그리고 협력이 나타납니다.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일원우주는 다원우주로 바뀝니다. 이 다원 우주 안에서는 무수한 실재들이 타당성의 다양한 기준에 준거해 타당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스스로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있음에서함으로64>
6.
저도 모르지요. 그저 다른 말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실재라고 생각하는) 놀이를 같이 하도록 다른 사람을 초대하려는 시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바람은 내 말을 (나의 언어를) 잘 구사해서 정치가 됐건, 과학, 시 혹은 무엇이 됐건 모든 대화 속에 나의 윤리가 내재되도록 하는 것, 그래서 내가 어떤 문장을 말하더라도 늘 점잖은 사람으로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려 하지 않는 사람, 자신을 재판관이나 경찰과 같은 지위로 끌어 올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각자의 여지를 부여하는 그런 점잖은 사람 말입니다. 이게 제가 궁긍적으로 올바른 언어와 설명형식을 말하기 위한 어떠한 범주도 어떠한 목록표도 언급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발명품이다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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