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사구게

사구게(3)의 이해

T1000.0 2020. 8. 5. 09:12

1.

[제3 사구게: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색신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2.

공동체 수행 대중은 분과별로 ‘공동체’를 주제로 연찬 시간을 가졌습니다. 총 세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분과별로 열띤 토론을 펼친 후 오후 5시에 강당으로 모두 모였습니다. 스님이 자리하자 곧바로 전체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분과별 토론 결과를 공유했습니다.

스님은 토론 결과를 듣고 공동체 대중이 갖고 있는 다양한 생각에 대해 공감을 하면서, 수행자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각 사례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토론을 마치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중에는 정토회 안에 스님이 더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정토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스님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금 정토회에는 스님이 두 분 계십니다. 정토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법맥을 이어가려면 추가로 스님이 더 필요한가요? 공동체 성원 중에 출가를 시켜서 스님을 한 명 더 만들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정토회는 더 이상 스님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부터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법사로 대우해야지 스님으로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스님으로 대우한다면 여러분 자신부터 수행적 관점에 충실하지 않고 종교적인 관점에 충실하다는 반증입니다. 정토회는 수행공동체이므로 종교지도자인 스님으로 대우하는 관습은 없애야 합니다. 그냥 법사로서의 그 사람의 인격과 능력, 자질로 존중을 받아야지 승려라는 이름으로 존중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오래된 종교적인 관습 때문에 종교지도자로 예우를 받게 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것은 마치 부처님 당시에 출가한 승단 안에서 그 사람이 브라만이라는 이유로 예우를 받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스님’이라는 말의 뜻은 부처님 당시에 브라만과 같은 사제 계급의 의미로 변질된 측면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스님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스님이기 때문에 예우한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수행하는 정토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토회에는 승려가 전혀 필요 없어요.

그런데 누군가 승려가 이미 된 분이 정토행자가 되겠다고 하면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에 브라만이 출가를 하겠다고 하면 승단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브라만이니까 출가할 수 없다’ 이런 사례는 부처님 당시에도 없었어요. 마찬가지로 승려가 된 분이 정토회에 들어오겠다고 할 때는 받아야 됩니다. 반대로 여러분 중에서 출가한 승려가 되겠다고 하면, 승려로서 특별한 대우를 안 받겠다는 전제하에 승려로서 정토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이 되어야 합니다. 안 되면 그건 역차별에 해당합니다.

승려는 정토회에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정토회는 수행공동체이므로 승려라는 종교지도자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앞으로 활동을 하다 보면 승려가 이 활동에 동참할 수는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승려가 필요한 활동들이 좀 있습니다. 천룡사도 복원해야 하고, 죽림정사도 유지해야 하고, 아도모례원도 운영해야 하고, 봉림사지도 복원해야 하는 등 용성조사님의 유훈 실현에 관계된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은 정토회와 직접 관계는 없지만 제가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일들이에요.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업무의 역할상 승려가 필요하다고는 말할 수 있어요.”

추가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그래도 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님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스님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2차 만일결사 때 세계인들에게 전법을 하려면 불교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는 게 전법에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해요. 만약 법륜 스님이 안 계시게 되었을 때도 정토회의 얼굴 역할을 하는 사람은 스님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정토회 안에 스님이 있는 게 전법에 효과적이라는 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조언을 했습니다. 여러분처럼 집을 떠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승복을 딱 입고 활동하면 그 효과가 10배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제안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나 저는 효과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이름을 붙이고 어떤 모양을 한다고 해서 수행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토행자는 이 원칙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역할상 승려가 필요하다면 몇몇이 승려가 되는 것을 수용할 수는 있다고 보셔야 해요. 원칙도 지키면서 확산도 될 수 있다면 가장 좋지만, 원칙과 확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다면 저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정체성을 승려라고 생각하는 건 아직 과거 종교로서의 불교에 생각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부처님은 출가라는 자기 결단을 한 사람이라면 남녀도 관계없고 계급도 관계없이 승단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출가 혁명입니다. 그러나 출가 승려가 점점 기득권화되어 가니까 그 후에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출가와 재가를 구분할 필요가 없고, 발심을 했느냐의 여부를 갖고 보살로 승단을 구성하겠다.’

불교도 이렇게 발전을 해온 것인데, 오늘날 인권이 신장되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왜 승려가 필요합니까? 정토회에도 승려라는 권위와 형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마치 부처님 당시에 ‘그래도 브라만이 있어야 대중이 따를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아요. (모두 웃음)

전통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통은 아닙니다.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해서 바른 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저만 하더라도 승복을 입고 있으니까 종교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사람이 죽으면 저보고 염불을 해달라고 합니다. 이런 종교적인 요구는 세상의 문화이고 관습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사람들의 요구를 다 거부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나의 본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강조하겠습니다. 정토회 안에서는 승려라는 이유로 대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법륜 ‘스님’이기 때문에 저를 스승으로 삼아서 따른다면, 그 사람은 정토행자가 될 자격이 없어요. 저는 법사로서 역할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런 법문을 하는 것이고, 법문을 하는 사람이 다만 승려일 뿐입니다.

정토회의 중심이 튼튼한 이유는 처음 정토회를 시작할 때 제가 승복을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승려가 된 것이 나중에 정토회의 확산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초기에 정토회를 시작한 사람들은 제가 승려이기 때문에 귀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제가 머리를 기르고 있을 때 귀의하고 정토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지간한 어려움에도 흔들림이 없는 거예요. 제가 내일 당장 양복을 입고 무대에 선다고 해서 즉문즉설을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모두 웃음)

오늘도 풍성한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공동체 수행 대중은 매일 이어지는 스님과의 공청회를 통해 수행공동체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체득해가고 있습니다.

스님에게 삼배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공청회를 마쳤습니다. 저녁 8시에는 예불을 한 후 분과별로 흩어져서 오늘 하루를 보낸 소감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스님의 하루 200804)

3.

스님은 답답한 나머지 문경 봉암사의 조실스님이신 서암스님을 찾아가 불교계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하소연했다고 한다. 법륜스님의 말을 다 듣고 난 큰스님은 “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밑에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라네. 그곳이 절이야. 이것이 불교라네”라고 말씀하셨단다. 그 말을 들은 법륜스님은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은 사람이 스님이고, 기와집이 절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4.

옛날에 어질고 현명한 왕이 있었다. 연일 국정에 몰두하던 왕이 모처럼 짬을 내 신화들과 함께 사냥을 떠났다. 아침 일찍 떠났다가 저녁에 환궁할 요량이었는데, 사냥에 심취한 나머지 미처 해가 기우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날이 너무 어두워 궁궐까지 갈 수가 없었다. 충직한 신하들은 얘가 탔다. 왕이 말했다. 저기, 저 민가에 하루 묵도록 하자. 신하들은 펄쩍 뛰며 두 팔을 내 저었다. 어떻게 전하께서 누추한 여염집에 들 수가 있겠느냐며, 밤길을 재촉해서라도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때 왕이 말했다.

"내가 저 집에 들어가면, 내가 백성이 되겠느냐 아니면 저 집이 궁궐이 되겠느냐."

『문학동네 20호, 1999년 가을, <박상륭 인터뷰>』


4. 나의 각오

'나는 어떤 특권의식도 갖지 않겠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이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이름을 붙이고 어떤 모양을 한다고 해서 수행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저 집에 들어가면, 내가 백성이 되겠느냐 아니면 저 집이 궁궐이 되겠느냐."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글 보관함